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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가 오면

by김경훈

구술자 · 김순옥 77세 전 파독 간호사

근무 · 1971년부터 1978년까지 서독 에센 시립병원 노인 병동

고향 · 부산 영도

환자 · 헤트비히 브란트 당시 84세

들은 날 · 2026년 봄 부산 영도 자택



에센


김순옥이에요. 부산 영도에서 나서 영도에서 늙었어요. 중간에 7년만 빼고요.


1971년 봄에 서독에 갔어요. 스물두 살. 간호학교를 막 나왔을 때예요. 그때 우리나라는 가난해서 간호사랑 광부를 독일에 보냈어요. 파독 간호사라고 하지요. 만 명 넘게 갔어요. 월급을 받으면 거의 다 집으로 부쳤어요. 저도 그랬어요. 남동생 셋 학교를 그 돈으로 보냈어요.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스물몇 시간을 갔어요. 내리니까 3월인데 진눈깨비가 오더라고요. 공기에서 석탄 냄새가 났어요. 에센은 탄광 도시였어요. 루르 지방이라고 굴뚝이 숲처럼 서 있는 데예요. 하늘이 늘 회색이었어요.


독일어는 비행기 타기 전에 석 달 배운 게 다였어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아파요 괜찮아요. 그 정도. 병원에 가니까 아무 말도 안 들렸어요. 수간호사 잉그리트 선생님이 뭐라고 하면 고개만 끄덕였어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첫 달에는 밤마다 울었어요. 기숙사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기숙사는 병원 뒤편 3층 건물이었어요. 한국 간호사 열두 명이 같이 살았어요.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양배추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먹었어요. 고춧가루는 한국에서 올 때 가방에 몰래 넣어 온 거였어요. 냄새 때문에 독일 사감 아주머니한테 혼났어요. 그래도 그게 우리한테는 집 냄새였어요.


엄마한테 한 달에 한 번 항공 엽서를 보냈어요. 파란 얇은 종이에 깨알같이. 잘 지낸다고. 밥 잘 먹는다고. 다 거짓말이었어요. 답장은 두 달 뒤에 왔어요. 엄마 글씨가 삐뚤삐뚤했어요. 엄마는 학교를 못 다녀서 동생이 대신 써줬어요. 끝에는 늘 엄마가 직접 쓴 한 줄이 있었어요. 아가 밥 묵었나.



일


처음에 우리한테 주어진 일은 간호가 아니었어요.


대소변 받기. 침대 시트 갈기. 환자 몸 닦기. 독일 간호사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다 우리 차지였어요. 말이 안 통하니까 손으로 하는 일만 시킨 거예요.


그리고 시신 닦기.


환자가 돌아가시면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혀서 지하 영안실로 내려보내요. 독일 말로 토텐베셰라고 해요. 죽은 사람 빨래라는 뜻이에요. 독일 간호사들은 그걸 제일 싫어했어요. 그래서 그것도 우리가 했어요.


처음 했을 때가 생각나요. 할아버지였어요. 몸이 너무 차가워서 손을 데었나 싶었어요. 독일 사람들은 몸이 커서 혼자서는 돌려 눕히지도 못했어요. 같이 간 박영자 언니랑 둘이서 끙끙대면서 했어요. 영자 언니가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이거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근데 이상하게 저는 그 일이 싫지 않았어요. 말을 몰라도 되는 일이었거든요. 돌아가신 분한테는 독일어를 못 해도 됐어요. 그냥 정성껏 닦아드리면 됐어요.


손이 하는 말은 어느 나라나 똑같아요.



헤트비히


헤트비히 브란트 할머니는 제가 간 지 1년쯤 됐을 때 병동에 들어오셨어요.


여든넷이었어요. 치매가 있으셨어요. 몸은 작고 말랐어요. 은색 머리를 늘 단정하게 땋고 계셨어요. 가족이 아무도 없었어요. 면회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할머니는 밤마다 창가에 앉아 계셨어요. 잠을 안 주무시고. 창밖으로 병원 정문 쪽을 보면서.


그러다 누가 복도를 지나가면 물으셨어요.


이스트 에어 숀 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 알았어요. 그 애 벌써 왔어요? 하는 말이었어요.


잉그리트 선생님이 사정을 말해줬어요. 할머니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대요. 클라우스. 1945년 봄에 열여섯 살이었는데 전쟁 끝나기 직전에 소년병으로 끌려갔대요. 베를린으로. 그러고 소식이 끊겼대요. 죽었다는 통지도 없이. 그냥 안 돌아왔대요.


할머니는 27년 동안 기다리신 거예요. 치매가 오고 나서는 시간이 1945년에 멈춰버렸고요. 매일 밤 오늘은 클라우스가 오는 날이라고 생각하셨대요.


할머니 협탁 서랍에는 하모니카가 하나 들어 있었어요. 녹슨 은색 하모니카. 클라우스 거라고 했어요. 할머니는 그걸 연주할 줄 모르셨어요. 그냥 가끔 꺼내서 두 손으로 감싸고 계셨어요. 체온으로 데우듯이.



섬집아기


저는 야간 근무가 많았어요. 독일 간호사들이 밤 근무를 싫어해서요.


새벽 2시쯤 병동이 조용해지면 린넨실에 들어가서 시트를 갰어요. 그때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섬집아기.


부산 영도 사람한테는 그 노래가 남의 노래가 아니에요. 엄마가 바다에 일하러 나간 사이에 아기가 혼자 집을 보다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노래. 우리 엄마도 영도 바닷가에서 굴을 땄어요. 제가 어릴 때 엄마가 일하러 나가면 저는 정말 혼자 집을 봤어요. 그 노래를 부르면 엄마 생각이 나서 울었어요. 울려고 불렀는지도 몰라요.


어느 날 밤 린넨실 문이 열렸어요. 헤트비히 할머니가 서 계셨어요. 맨발로. 링거대를 끌고.


할머니가 제 앞에 와서 앉으셨어요. 시트 더미 옆에. 그러고 제 얼굴을 한참 보셨어요.


저는 노래를 멈췄어요.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제 입을 가리키셨어요. 계속하라는 듯이.


할머니 손가락이 떨렸어요. 맨발이 차가워 보여서 제 카디건을 벗어 발에 덮어드렸어요. 할머니한테서 라벤더 비누 냄새가 났어요. 독일 할머니들이 다 쓰는 비누예요.


그래서 다시 불렀어요. 할머니는 눈을 감고 들으셨어요.


그날부터 할머니는 새벽 2시면 린넨실로 오셨어요. 저는 시트를 개면서 섬집아기를 불렀어요. 할머니는 옆에 앉아서 들으셨어요. 한 달쯤 지나니까 할머니가 같이 흥얼거리기 시작했어요. 가사는 모르시니까 음만. 독일 할머니 목소리로. 음정이 조금씩 틀렸어요.


할머니가 무릎 위에 하모니카를 올려놓고 계셨어요. 노래하는 동안 손가락으로 하모니카 구멍을 하나씩 짚으셨어요. 소리는 안 내고. 그냥 짚기만.



아직이요


할머니가 밤마다 물으셨어요. 이스트 에어 숀 다. 그 애 왔어요?


저는 처음엔 대답을 못 했어요. 독일어를 몰라서요.


나중에 대답하는 법을 배웠어요. 사전을 찾고 영자 언니한테 물어서.


노흐 니히트. 발트.


아직이요. 곧 와요.


거짓말이었어요. 27년이 지났는데. 근데 할머니는 그 대답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시고 다시 창밖을 보셨어요. 안심한 얼굴로.


할머니는 저를 가끔 클라우스라고 부르셨어요. 제 손을 잡고. 클라우스 너 손이 왜 이렇게 작아졌니. 그런 말을 하셨대요. 영자 언니가 통역해 줬어요.


저도 그냥 대답했어요. 한국말로.


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할머니는 그 말을 알아들으시는 것 같았어요.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요.



겨울


1973년 1월이었어요. 눈이 많이 왔어요.


할머니가 폐렴에 걸리셨어요. 열이 내리지 않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안 남았다고 했어요.


마지막 밤에 제가 근무였어요.


새벽 2시에 할머니 병실에 들어갔어요. 할머니는 더 이상 린넨실까지 걸어오실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갔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섬집아기를 불렀어요. 작게. 할머니 숨소리가 그르렁거렸어요. 가래 끓는 소리. 방 안에 소독약 냄새랑 열 냄새가 섞여 있었어요. 창밖으로 눈이 내렸어요. 소리 없이.


할머니가 눈을 뜨셨어요.


제 얼굴을 보셨어요. 그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한국말로.


아가.


제가 노래 중간에 늘 하던 말이에요. 아가. 노래 가사가 아니라 제가 혼잣말로 붙이던 말. 할머니가 그걸 들으셨던 거예요. 1년 동안.


엄마가 엽서 끝에 늘 쓰던 그 말이에요. 저는 노래를 부르다가 엄마 대신 저한테 그 말을 해줬던 거예요. 아가. 그 말을 독일 할머니가 제게 돌려준 거예요. 엄마 목소리처럼.


그러고 할머니가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셨어요. 정문 쪽으로. 그리고 독일어로 말씀하셨어요.


에어 이스트 다.


그 애가 왔어요.


할머니 얼굴이 활짝 펴졌어요. 27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얼굴로.


그러고 숨을 거두셨어요.


저는 창밖을 봤어요. 정문 앞 가로등 아래에 눈만 내리고 있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눈 위에 발자국이 한 줄 있었어요. 정문에서 병원 건물 쪽으로. 작은 발자국. 열여섯 살쯤 되는 남자애 발 크기.


야간 경비원 베커 씨 발자국이었을 거예요. 순찰을 돌았을 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텐베셰


새벽에 제가 할머니를 닦아드렸어요.


따뜻한 물을 받아서 얼굴부터. 은색 머리를 풀어서 빗기고 다시 땋아드렸어요. 할머니가 늘 하시던 대로. 세 가닥으로.


할머니 오른손이 하모니카를 쥐고 있었어요. 숨을 거두실 때 쥐고 계셨던 거예요. 손가락이 하모니카를 꼭 감싸고 있었어요.


잉그리트 선생님이 하모니카를 빼서 유품 상자에 넣으라고 했어요. 영안실에 물건을 들고 내려가면 안 된다고.


저는 할머니 손을 펴려고 했어요. 안 펴졌어요.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굳지도 않았는데 손가락이 안 펴졌어요.


그래서 할머니 귀에 대고 섬집아기를 불렀어요. 한 소절.


손가락이 펴졌어요. 스르륵.


저는 하모니카를 빼지 않았어요. 다시 할머니 손에 쥐여드렸어요. 잉그리트 선생님한테는 손이 안 펴진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선생님은 저를 한참 보더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요.



베커 씨


할머니는 지하 영안실로 내려가셨어요.


다음 날 아침 야간 경비원 베커 씨가 퇴근하다가 저를 찾아왔어요. 예순 살쯤 된 아저씨였어요. 전쟁 때 다리를 다쳐서 절룩거렸어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어요.


베커 씨가 영자 언니를 붙잡고 뭔가를 한참 얘기했어요. 영자 언니 얼굴이 하얘졌어요.


어젯밤 새벽 4시쯤 지하 순찰을 도는데 영안실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났대요.


처음 듣는 멜로디였대요. 독일 노래가 아니었대요. 느리고 슬픈 노래.


베커 씨가 영자 언니 앞에서 그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었어요. 서툴게.


섬집아기였어요.


베커 씨가 영안실 문을 열었대요. 아무도 없었대요. 할머니는 철제 침대에 하얀 천을 덮고 누워 계셨대요. 그런데 하모니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대요. 침대 옆에.


베커 씨가 하모니카를 주워서 할머니 손에 다시 쥐여드렸대요. 하모니카가 따뜻했대요. 방금 누가 입을 대고 불었던 것처럼. 구멍에 입김 습기가 서려 있었대요.


영안실은 섭씨 4도예요.


베커 씨는 그 말을 하고 저한테 고개를 숙였어요. 그러고 절룩거리면서 갔어요. 그 뒤로 베커 씨는 저를 볼 때마다 모자를 벗었어요.


그리고 하나 더. 베커 씨는 그날 새벽에 정문 쪽 순찰을 안 돌았대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영자 언니가 그것도 통역해 줬어요.



유언장


할머니 장례는 시에서 치러줬어요. 가족이 없으니까요. 에센 남쪽 공동묘지에 묻히셨어요. 하모니카는 관에 같이 들어갔어요.


저는 1978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영도에서 결혼하고 애 둘 낳고 손주 셋 봤어요. 할머니 생각은 가끔 했어요. 눈 오는 밤이면.


3년 전에 편지가 한 통 왔어요. 독일에서.


폴크스분트라는 단체였어요. 독일 전쟁 희생자 유해를 찾아서 가족한테 돌려주는 곳이에요. 지금도 전쟁터였던 곳에서 유해를 찾는대요. 70년이 넘었는데도.


베를린 공사 현장에서 유해가 나왔대요. 1945년 봄에 죽은 소년병들. 그중 한 명의 인식표에 이름이 있었대요.


클라우스 브란트.


폴크스분트에서 가족을 찾았는데 아무도 없었대요. 그래서 기록을 뒤졌대요. 어머니 헤트비히 브란트의 유언장이 에센 시청에 남아 있었대요.


유언장에 딱 한 줄이 있었대요. 재산도 없고 물려줄 것도 없는 유언장에.


클라우스가 돌아오면 한국인 간호사 김순옥에게 알려주시오.


할머니가 언제 그걸 쓰셨는지 모르겠어요. 치매가 오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는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저를 늘 클라우스나 슈베스터라고 부르셨거든요. 간호사 아가씨라고.


폴크스분트 사람들이 50년 된 병원 인사 기록을 뒤져서 제 주소를 찾았대요.


나중에 그 단체 직원 슐츠 씨가 국제전화를 했어요. 손녀가 통역을 해줬어요. 슐츠 씨가 그랬대요. 유언장을 찾았을 때 다들 이 한국 간호사가 누구냐고 웃었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진짜로 있었다고. 그 병동에서 7년 일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다들 웃음을 그쳤다고.


슐츠 씨가 마지막에 물었대요. 혹시 브란트 부인을 기억하시느냐고.


저는 손녀한테 대답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그다음


작년 가을에 에센에 다녀왔어요. 큰딸이 같이 가줬어요. 52년 만이었어요.


클라우스는 할머니 옆에 묻혔어요. 같은 묘에. 폴크스분트 사람들이 그렇게 해줬어요.


묘비에 이름이 두 개 새겨져 있었어요. 헤트비히 브란트. 클라우스 브란트.


그 앞에 꽃을 놓고 섬집아기를 불렀어요. 일흔여섯 살 할머니 목소리로. 음정이 조금씩 틀렸어요. 할머니가 부르시던 것처럼.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말씀드렸어요. 독일어로. 52년 만에 처음으로 거짓말이 아닌 대답을.


에어 이스트 다.


그 애 왔어요.


설명은 다 할 수 있어요. 발자국은 다른 사람 발자국이었을 수도 있고 하모니카는 누가 장난을 쳤을 수도 있고 손가락은 그냥 때가 돼서 펴졌을 수도 있어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요.


근데 묘지를 떠나려는데 큰딸이 제 소매를 잡았어요.


엄마 무슨 소리 안 들려?


바람 소리였어요. 묘지 둘레에 큰 나무들이 있었거든요. 바람이 가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소리를 냈어요. 높았다 낮았다 하는 소리.


하모니카 소리 같았어요.


섬집아기를 아주 서툴게 따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열여섯 살 남자애가 처음 배운 노래를 부르듯이.


큰딸은 바람 소리라고 했어요. 맞아요. 바람 소리였을 거예요.


저는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었어요. 노래가 끝날 때까지. 큰딸도 더는 아무 말 안 했어요.


끝까지 다 부르더라고요. 할머니가 늘 틀리던 그 음에서 똑같이 틀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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