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버지께 카지노톡이 왔다. 건강 프로그램 화면 캡처와 함께. 얼마 전 엄마하고 통화하며 애들이 안 큰다고 걱정한 딸의 걱정을 전해 들으셨는지 성장에 좋다는 약초 이름과 스트레칭 동영상을 보내주셨다.
캐나다에서 이런 걸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약초의 효능도 께름칙한, 어르신들 상대로 약 파는 광고인 것을 아버지는 칠십 평생 모르고 계신 걸까.
솔직히 감사한 마음보다는 답답함이 먼저 치밀었다.
내 결혼식에서 신부보다 신부 아버지 이야기가 더 많이 오르내릴 정도로, 아버지는 어디 가든 잘생겼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다. 말쑥한 외모에 주변 사람들을 재미나게 해주는 입담으로 인기 많은 스타일이지만, 나와 엄마는 그런 인싸 아버지가 어쩔 땐 창피해서,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 좋아하고 어느 모임이든 빠지지 않는 성격에 월급은 밖으로 주로 돌았다. 사기를 당해 돈을 잃어도 좋은 일에 쓴 거라고 스스로 인심 좋게 포장했다. 작은 돈을 헤프게 쓰고 정작 큰돈이 필요할 땐 엄마 앞으로 미뤘다. 평생을 자기 입맛에 맞게 본인 월급을 썼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결혼식을 끝으로 마치 인생의 모든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일 년 뒤 퇴직하셨다. 그날의 결혼식 하객 장부는 아버지의 훈장이자 성적표였다.
비록 돈은 당신 자신을 위해 더 많이 쓰셨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가족을, 특히 외동딸인 나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늘 걸어서, 혹은 차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잡고 걸음걸이를 맞추느라 내 발걸음이 아등바등 바빠져도, 그 큼직한 온기가 좋아서 오래도록 손을 놓지 않고 매달렸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아버지 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을 때도, 그땐 미처 몰랐다. 매일 아침 딸을 태워 나르는 일이 얼마나 귀찮고 피곤한 일이었을지, 라이딩 쳇바퀴를 오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슬롯인이 되어서도 아버지는 밤늦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엄마가 만든 반찬을 한가득 들고 가깝든 멀든 늘 찾아오셨다. 큰 아이가 한 달에 한 번 대학병원 검진을 가야 할 때도 기사를 자처하셨고, 둘째를 낳았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손주를 돌봐주셨다. 내가 수술 부작용으로 방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할 때도, 온라인 게임이 멀리 있는 남편보다 먼저 달려와 응급실 의료진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는 이내 글썽이시던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에 하소연이라도 해볼까 싶어 쓰기 시작한 글인데,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니 머쓱해진다. 이렇게 다정한 아버지였는데 손을 뻗어 다가오는 아버지를 외면하듯 이역만리까지 떠나버린 딸이, 내가. 이제 보니 너무 차갑다.
그저 손주들 성장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보낸 카톡 하나에, 짜증부터 낸 내 모습이 부끄럽다. 자식은 평생 부모의 마음을 못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