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온 여자 2
그로부터 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경험도, 자금도 부족했던 초보 대학생 여행자는 글을 써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보다 자유롭게 모험심의 부름에 응했다. 대학생 시절 첫 여행을 태국에서의 3주 혼자 자유여행으로 걸음마 뗀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5박 6일 도쿄 여행을 떠난 뒤…… 생각했다.
‘엥? 이상하다? 여행이 왜 이렇게 쉽지?’
신고식을 너무 쓰게 치른 탓에 도시 관광 정도는 달달한 음료수처럼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 나는 일본의 도시들과 중국의 고도들, 발리와 태국의 섬들을 오갔다.
내 주된 여행 방식은 ‘디지털 노마드’이다. 나는 주요 관광지에 들르는 것보다 한 지역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며 그 지역에서의 느린 일상을 즐기고, 일과 여행을 병행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직업은 디지털 노마드 하기에 이상적이었다. 고정된 사무실이나 무거운 장비도 필요 없이, 캐리어에 랩톱 한 대만 담으면 충분하니까.
해외의 여러 장소에서 긴 시간을 보냈으며, 나만의 여행법도 생겼다. 태국의 햇병아리였던 나는 여행사 직원에게 플러팅을 당하질 않나, 툭툭에서 성추행을 당하질 않나 거친 시간을 보내왔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충분히 능숙해진 어른 여행자인 나는 더 이상 그런 위태로운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난 그렇게 믿었다.
길리 트라왕안, 줄여서 길리T는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으로, 산호초와 거북이로 유명한 곳이다. 길리T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되어 있으며, 흔히 마차와 자전거를 타고 왕래한다.
초등학생 이후로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던 내가 자전거의 핸들을 쥐게 된 건 그래서였다. 당연히 쉽진 않았다. 포장되어 있는 자전거도로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말똥으로 얼룩진 울퉁불퉁한 흙길을 불편하게 달려야만 했다. 몇 번이고 휘청거리고 넘어지면서. 하지만, 길리T의 둘레길을 달리며 길 밖으로 펼쳐진 메론소다 같은 바다를 보는 일은 정말 그럴 가치가 있었다. 마침 나를 보고 시원스레 웃으며 손 흔드는 가게 주인까지.
“아아안녕, 으아아악!”
“이런, 괜찮아?”
마주 인사해주려고 핸들에서 손을 뗐다가 자전거가 울타리를 들이박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정말 괜찮았다. 친절한 가게 주인이 한걸음에 달려와 도와주었으니까.
길리T는 밀크티색 모래사장과 투명한 바다가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하늘에서 오렌지색 빛이 내릴 때쯤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는데, 자전거를 비틀비틀 타고 있자니 친구 무리와 함께 자전거를 탄 덩치 큰 백인 남자가 내 진로 앞에 박을 듯이 들이닥치며 소리쳤다.
“워!”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깜짝 놀란 내가 돌아봤지만, 그는 낄낄거리면서 자전거를 몰아 사라졌다.
다음날, 나는 비슷한 일을 한 번 더 겪었는데 마찬가지로 친구 무리를 몰고 다니는 백인 남자였다.
다음 해의 나는 발리의 아메드에 갔다. 아메드는 작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투명한 바다는 조금 과장하자면 호수만큼이나 잔잔하고, 발리 내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수중 환경이 아름다워 스노클링과 다이빙으로 시간을 보내기 제격인 곳이었다.
나는 그 마을에서만 3주의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파도가 발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스노클링을 하다가 지치면 나와 낮잠을 자거나 바카라을 읽고, 점심을 먹고 또 스노클링을 했다. 저녁에는 석양과 마을의 정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요가 센터에서 요가를 하거나 마사지를 받았다. 꿈같은 3주였다.
아메드는 아직 관광객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관광지화가 충분히 되지 않은 곳이었다. 버스는커녕 택시도 없어 우버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이동을 하려면 스쿠터를 타야만 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스쿠터를 렌트해 면허 혹은 무면허 운전을 했다.
나는 이륜차 면허가 없었고 무면허 운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스쿠터 렌트샵 직원들은 유료 콜택시 서비스를 제공했다. 발리의 카지노톡인 왓츠앱으로 부탁하면 5만 루피아(한화 약 4500원)를 받고 마을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항상 이용하던 숙소 앞 렌트샵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옆의 다른 렌트샵으로 갔다. 덩치는 크지만 미소가 수줍은 남자가 날 리파 비치까지 태워주었다.
리파 비치의 선베드에 자리 잡은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스노클링 마스크를 안 가져왔어!’
비치에서 대여할 수 있긴 하지만, 나는 마음에 쏙 드는 개인용 스노클링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걸 가지러 가기 위해 왓츠앱으로 아까 그 남자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숙소로 다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뭘 두고 왔어.」
남자가 곧 답장을 보냈다.
「금방 갈게.」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숙소에 갔다가, 리파 비치로 돌아왔다. 한 번만 오가면 될 길을 하루에만 두 번 왕복하게 된 것이다. 이놈의 기억력!
오후 4시쯤, 나는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남자를 불렀다. 그를 기다리는데 주인 없는 개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개를 귀여워하며 쓰다듬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개와 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묘하게 따뜻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스쿠터 뒷좌석에 탔다.
나는 동남아에서 이륜차에 타는 것을 좋아한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바람과, 빛나는 풍경과 약간의 스릴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오죽 좋아하면, 발리의 짱구에서 우붓까지 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우버 오토바이 택시로 이동한 적이 있을 정도다. (첫 30분은 즐거웠으나 이후 30분은 허리가 아팠다.)
그래서 그날도 드라이브를 즐겼다. 대낮에 비해 조금 부드러워진 오후의 햇살과 푸르른 풍경, 언덕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그때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운전이 아니라 다른 거라도 괜찮아.”
미안하지만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지 않았다. 시끄러운 바람 소리와 배기관 소음 때문에 이륜차 운전 중은 대화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다. 여전히 영어 실력이 짧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대충 “응, 응.” 정도로 응수했다.
아메드는 관광지화가 충분히 되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나를 대하는 현지인들의 태도에 벽이 몹시 낮은 느낌이었다. 스몰토크도 자주 하고, 자주 얼굴 보고 대화하다 보면 현지인 개개인과 친해질 수 있었다. 길리T처럼 상업화된 지역의 경우, 현지인들이 나를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철저하게 고객으로만 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때로는 그 깔끔함이 편하기도 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는 아메드에서의 경험 역시 새롭고 즐거웠다.
그런데 이 특성은 장점이긴 하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현지인들이 나를 고객만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본다는 건…… 여자로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비용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난…… 너를 사랑하니까.”
음……?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설마, 바람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거겠지.
내가 들은 말과 상황의 부조화에 나는 그의 말을 잘못 이해한 줄로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대체 누가 스쿠터 뒷좌석에서 고백을 듣겠는가. 그것도 오늘, 태어나서 얼굴 딱 4번 본 사람에게. 하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숙소에 도착해 스쿠터에서 내린 나는, 남자의 몹시 수줍은 미소를 보며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락할게.”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황급히 렌트샵 쪽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남자는 왓츠앱으로 몇 개의 연락을 남겼다.
「꼭 연락해. 네가 부르면 반드시 너에게 갈게. 넌 이제 다른 교통수단을 탈 필요가 없어.」
무진장, 매우,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창문에서 숙소 앞을 내다보니 그가 내가 원래 이용하는 렌트샵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는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스쿠터를 타고 멀리 가지 말고, 그냥 숙소 근처에서만 있을까?’
하지만 언제까지 저럴지도 모르는 일이고, 저 남자 눈치 보느라 아까운 여행 기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척 내가 늘 이용하던 렌트샵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 잘 잤어?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내가 데려다줄게.”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나는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아니, 없어.”
그리고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렌트샵으로 들어갔고, 곧 스쿠터 뒷좌석에 타고 출발했다. 그가 보든가 말든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거절 의사 표시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는 이후로도 끈질기게 이틀 동안 계속 그곳에서 어슬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