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온 여자 3
발리의 많은 바닷가에는 사설 선베드가 놓여 있고, 이용하려면 임대업자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아메드의 리파 비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선베드와 비치 타월을 하루 종일 대여하는 데 8만 루피아(한화 약 6800원)를 냈다.
리파 비치에만 2주 정도를 들락거렸더니 자연히 임대업자와도 말을 트게 되었다.
“꼬망(Koman), 발리에는 꼬망이 왜 이렇게 많아?”
발리에는 도처에 꼬망이 있었다. 택시 기사도 꼬망, 식당 주인도 꼬망, 여행사 직원도 꼬망이었다. 한국의 김 서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무한 꼬망 증식 현상에 대해 한 명의 꼬망에게 묻자, 그는 자세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발리에서는 아이가 몇째인지에 따라 이름을 정해. 첫째는 와얀(Wayan)이야. 둘째는 마데(Made), 카덱(Kadek). 셋째는 꼬망, 뇨망(Nyoman). 넷째는 크툿(Ketut).”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하던 그가 내게 물었다.
“넌 몇째야?”
“난 첫째야.”
“그럼 넌 첫째 딸이니까 닐루(Ni Luh)야.”
내게 발리 이름이 생기다니! 이름이 예뻐서 난 기분이 좋아졌다.
아메드의 바다는 알록달록한 산호와 물고기로 가득하고, 물은 투명해서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여 정말로 스노클링할 맛이 났다. 나는 거의 매일 구명조끼와 오리발, 스노클링 마스크를 착용하고 해변에서 걸어 들어가 스노클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처음으로 아메드의 바다가 내 기대를 배신했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바다가 거칠고, 물은 우유처럼 뿌예져서 아무리 들어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선베드에서 바카라이나 읽어야겠다.’
소득 없이 푹 젖은 몸으로 바다에서 걸어 나오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뭐 좀 봤어?”
꼬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선베드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못 봤어.”
“그럴 것 같았어. 오늘은 조수간만 때문에 파도가…….”
그가 뭔가 설명했는데 내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오늘은 달의 인력으로 인해 파도가 거친 날이고, 그래서 수중 시야가 나쁘다는 것 같았다.
“오늘 같은 날에도 잘 보이는 스팟을 알아. 이따 오후 2시에 보여줄게.”
꼬망의 쾌활한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쯤에서 내가 왜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의문을 느낄 수도 있겠다. 일단은 두 주간 안면을 익힌 얼굴이었다는 것이 제일 컸다. 그리고 발리에서 1:1 스노클링, 다이빙 가이드는 흔한 일이다. 물론 보통은 유료인데, 나는 꼬망이 돈을 받을 예정이거나 (그는 꽤 구두쇠라서 선베드 가격을 잘 깎아주지 않았다) 아니면 두 주간 단골이었으니 서비스 차원인가 보다 했다.
그렇게 해서 바카라도 읽고, 점심도 먹고, 잠시 눈도 붙인 뒤 약속했던 오후 2시가 되었다. 오리발을 꿰어 차고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내게 꼬망이 다가왔다.
“준비 됐어?”
“응.”
그는 내 손을 이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 들어갔을 땐 20분을 헤엄쳐도 줄곧 우윳빛이었던 바다는 그의 앞에서 신기하게 맑아져 곧 5m 아래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정말 예쁘다.’
10년 전, 태국에서 스노클링을 처음으로 해본 뒤로 줄곧 여행지로는 아름다운 열대 바다를 선호하게 되었다. 물을 정말 무서워해서 첫 스노클링을 할 때도 고생했는데, 이제는 바다만 보면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됐다.
알록달록한 산호와 물고기 떼 위로 헤엄치는 외국인들과 스쳐 지나갔다. 다들 즐거운 얼굴이었다.
‘이거 봐.’
꼬망이 산호로 가득한 바닥에 놓여 있는 푸른색 불가사리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그는 5m 아래로 잠수해서 불가사리를 가지고 나왔다.
물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던 불가사리는 물 밖에서도 독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새파랗게 보였다.
‘꼬망이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걸 보니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불가사리를 만져보았다. 말랑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표면은 딱딱하고 우툴두툴했다. 내가 불가사리를 만지자 꼬망은 다시 5m 밑으로 내려가 산호 위에 불가사리를 올려두고 나왔다.
정말 재미있었다! 꼬망은 물이 맑고 아름다운 스팟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파도가 심해서인지 속이 메스꺼웠다. 스노클링하면서 멀미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나는 꼬망에게 이제 슬슬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나를 이끌고 뭍으로 향했고, 시야는 다시 흐려졌다.
뭍에 나올 즈음에 나는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 거의 그에게 끌려 나오다시피 하다 발이 땅에 닿자 나는 일어섰다.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날 안아 들었던 것이다.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이따 밤에 나올래? 작은 파티가 있어. 별을 보고 같이 바비큐도 먹자.”
“어?”
나는 기운이 없어서 반응이 느렸다.
“아니, 괜찮아. 그것보다 내려줘.”
“왜? 그때 나와. 정말 재미있을 거야.”
“내려줘. 내려가고 싶어.”
나는 운동을 꾸준히 해서 힘이 센 편이었는데 그를 밀쳐내지 못하고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셌던 것이다.
“쟈, 난 네가 파티에 왔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난 널 사랑하거든.”
그의 품속에서 듣고 있자니,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도 지독히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그의 억센 손이 내 몸을 더듬거렸다. 그의 손가락은 특히 내 사타구니를 집요하게 쓰다듬고 더듬었다. 불쾌한데다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싫어. 싫다니까. 내려줘!”
“사랑해, 쟈! 오늘 밤에 봐.”
내가 발버둥 치자 그는 겨우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곧 짐을 싸서 숙소로 돌아왔다.
‘경찰이나 숙소 직원들에게 말할까?’
그런 생각을 했으나 나는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난 이곳에 온 지 삼 주밖에 안 된 외국인 여자애였고 저쪽은 삼십 년 이상 이곳에서 산 현지인이었다. 이곳 동네 사람들은 거의 다 서로 아는 사이니, 내 편을 진지하게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꼬망에게서 왓츠앱 메시지가 왔다. 파티에 오라는 내용, 일몰과 보트 위의 본인 사진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차단하거나 거절 메시지를 보내기는 좀 그랬다. 그랬다가 꼬망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진짜로 곤란해지니까.
그나마 하나, 다행인 점이라면…….
‘내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
애용하는 렌트 업체를 통해 오전에 공항으로 출발하는 택시도 예약해둔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끌고 나면, 출발하고 나면 괜찮았다.
나는 꼬망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안 돼. 내일 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나는 달력을 확인했다. 수요일 밤이었다. 내게는 6년간 이어온 온라인 TRPG 팀이 있는데, 수요일 밤마다 디스코드에서 진행했다. 나는 혼자 여행할 때는 온라인 TRPG 세션도 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참석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디스코드를 켜자, 익숙한 팀원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쟈 님, 어서 와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마음이 복잡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니 안도가 되기도 하고, 오히려 그렇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티를 내기가 그랬다. 차라리 팀원들에게 말하고, 함께 욕하고 넘길 일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이번 일은 함께 욕하기보다는 걱정을 살 만한 일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난 팀장이었다. 비행기로 8시간 거리에 있는 팀원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여행 중이니까 봐줘요.”
“우우.”
“여행 좋겠다.”
“부럽다.”
밝게 말하자, 사방에서 야유와 부러움의 말이 쏟아졌다. 세션이 시작됐다.
좀 전까지만 해도 무섭고, 불안하고, 머리가 복잡했는데 친한 사람들과 수다도 떨고 재미있는 세션에 집중하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한참 세션을 하던 도중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문을 제대로 잠갔던가?’
방문은 창밖의 풍경이 잘 보이도록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커튼을 걷으면 문 앞에 꼬망이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감정이 들었다.
그럴 리는 없었다. 그에게 내가 묵는 숙소와 호실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묵는 숙소는 리파 해변에서 차로 10분 거리였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세션을 하다 말고 살금살금 방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 밖으론 어두운 밤 풍경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문을 잠갔는지 확인했다. 잘 잠겨 있었다.
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 이어폰을 귀에 꽂으니, 아니나 다를까 팀원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쟈님, 뭐 해요?”
“미안해요. 문 잠갔는지 헷갈려서.”
“에이 뭐야.”
막힘없이 흐르던 흐름이 끊기자 맥이 풀렸는지 팀원들이 장난스러운 야유를 보냈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말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죠?”
다음날 오전,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까지 나는 줄곧 조마조마했다. 차가 고속도로를 타자, 나는 그제야 꼬망의 왓츠앱 계정을 차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