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라는 이병한의 알리바이
강연장이 사람들로 빼곡하다. 마이크를 쥔 남자의 낮은 목소리와 느린 말투. 그러나 흔들림 없다. UN은 이제 끝났다고. 새로운 '행성적 행정'을 담당할 세계 기구가 필요하고, 그걸 우리가 함께 디자인해보자고 말한다. 청년들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에게 귀를 세운다. 그는 사대 강국에 둘러싸인 작은 반도가 아니라, 신세계가 만나는 태극의 한복판에 우리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나온 그의 바카라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는 '매불쇼'에도, '노무현재단 알릴레오 북's'에도 나왔다. 역사학자이자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 이병한이었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확신에 찬 목소리는 청중을 모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청구서
그 강연장에서 그의 말에 매료됐던 청년 하나가 신용대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정 씨, 스물여덟 살. 2020년 북콘서트에서 이병한을 처음 만난 그는, 그로부터 몇 년 뒤 미디어 프로젝트에 관한 제안을 받았다. 이백억 투자가 곧 들어올 거라며 정 씨를 대표이사로 앉히겠다고 했다. 하지만 투자금은 들어오지 않았고, 당장 직원들 월급조차 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게다가 이병한은 자신의 신용카드 연체금과 생활비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정 씨는 일주일 안에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믿고 신용대출을 받아 이천만 원을 건넸다. 하지만 곤란할 때마다 이병한은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일 년 넘게 시간이 흘렀다.
지난해 초, 이번엔 정말 투자금을 구할 수 있다며 투자확약서까지 보여줬지만, 그 투자자라는 인물은 얼마 뒤 사기죄로 법정 구속됐다. 정 씨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방금까지 세계 기구를 논하던 그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게 왜 제 바카라임이죠. 현재 정 씨에게 남은 건 칠천만 원 넘는 빚이었다.
피해자는 정 씨 혼자가 아니었다. 6년 전, 이십 대였던 A 씨는 이병한의 제안으로 기후위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청년들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UN 후원금이 들어올 거라는 말을 믿고 석 달을 무급으로 일했다. 이병한은 그해 여름 내내 연락을 끊었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일 년을 기다린 청년들이 고용노동청에 신고했고, 몇 달이 더 지나서야 밀린 임금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이유를 댔다. 대선 후보와 매일 소통한다고, 유력 국회의원이 조언을 구한다고,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연봉 십억 원에 제안했다고, 미래에셋 회장과의 대화가 재미있었다고, 이병한은 반복해서 흘렸다. 어느 이름도 청년들이 검증할 방법은 없었다.
정작 그 시기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면 이 배신은 더 선명해진다. 정 씨에게 생활비를 빌리던 무렵에도 그는 방학마다 관심 가는 도시에서 한두 달씩 지내왔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연락을 시도했을 때는 뉴욕에 온 지 한 달째라고 답했다. 청년들에게는 연체금을 구해달라 손을 내밀면서, 정작 본인은 계절마다 거처를 옮기며 지내왔다. 청년에게 미래를 제시한다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현재조차 청년들이 대신 지불한 돈으로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서 가장 참담한 아이러니다.
미래학자라는 알리바이
이병한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해왔다. 이십 대는 슬롯과학도, 삼십 대는 역사학자, 그리고 유라시아 견문을 마친 뒤 사십 대에는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고. 나는 이 궤적에서 이동의 방향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역사학자라는 이름에는 무게가 있다. 사료가 있고, 논문 심사가 있고, 표절 여부를 원문과 대조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그 검증에서 걸렸다. 소현세자에 관한 그의 서술이 한 연구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정황이 나왔고, 심지어 원 논문의 오류까지 그대로 옮겨 적었다. 반면 미래학자라는 이름은 태생적으로 반증이 불가능하다.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말이니 지금 당장 틀렸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고, 틀려도 시점이 아직 안 됐을 뿐이라 얼마든지 미룰 수 있다.
이 전환은 청중의 전환이기도 했다. 역사학자의 청중은 표절과 오류를 잡아낼 수 있는 동료 학자들이다. 미래학자의 청중은 불안한 개인들, 그중에서도 AI와 취업과 국제 정세 앞에서 가장 크게 흔들리는 이십 대다.
검증할 능력이 없는 대신 위로와 확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그는 옮겨갔다. 심사받는 자리에서 심사받지 않는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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