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라는 거울로 본 자격의 시대, 그리고 다음 질문
네가 뭔데 감히
카메라 앞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면, 댓글창은 늘 비슷한 순서로 채워진다. 처음엔 내용에 대한 반응이 오다가, 조금 지나면 어김없이 이런 말들이 올라온다.
'이 사람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이지?' '나이 어린 것 치곤 잘 하네?' '여자가 뭘 안다고.'
오랜 시간 자료를 찾고 글을 쓰고 편집하며 만든 한 편의 영상이, 내가 누구인지 캐묻는 질문 앞에서 순식간에 내용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발언대에 설 자격을 매번 다시 증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매번 같은 문 앞에서 신분증을 요구받는다.
10년 가까운 해외 생활 동안, 나는 유럽인이 대다수인 커뮤니티에서 지냈고 미국과 멕시코에서도 살아봤다. 그 시간 동안엔 이런 걸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다이빙 강사로 일하며 만난 사람들은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몇 살인지 먼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방금 한 말이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를 놓고 싸웠지, 내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싸우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마주한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오래 생각했다. 이게 유독 이 나라의 습성이라면, 그 습성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러다 요즘 유시민을 보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하나 찾았다.
'지식 소매상'이라는 발명품
유시민은 스스로를 '지식 소매상'이라 불렀다. 얼마나 정확한 자기 인식인가. 그는 학자가 아니라 유통업자를 자처했다. 원전을 직접 읽지 못하는 대중에게 그것을 요약하고 해석해서 건네주는 사람. 이 포지션이 절묘했던 건, 학자의 권위보다 훨씬 친근하면서도 학자의 권위 못지않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회의원과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정계 은퇴 후에는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동시에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는 제작진이 가장 먼저 섭외한 멤버로, 그의 캐스팅이 불발됐다면 기획 자체가 무산됐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다. 정치적 정통성과 대중적 캐릭터, 그리고 지식의 해석권까지. 세 개의 권위를 동시에 쥔 사람은 흔치 않다. 정보가 희소하던 시절, 그가 어떤 바카라의 어떤 문장을 인용하면 그 문장은 검증 없이 진실이 되었다. 해석의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공동체의 의제를 설정하고 방향을 정하는 힘.
'촉법평론가'라는 마지막 무기
그런데 정청래 전 민주당 대표가 띄운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불발 이후, 그가 이상해졌다. 유튜브 방송에서 그는 이재명 대통령이 철거 용역을 동원해 진보 진영을 허물려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비판하는 젊은 평론가들을 철거 전문 비평가, 용역 평론가, 촉법 평론가라 불렀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을 두고, 욕먹을 일은 밑에 사람을 시키고 인기 얻는 일은 자신이 하는 마키아벨리식 통치라고 규정했다. 검찰개혁을 법무부 장관과 총리에게 맡긴 걸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을 그대로 AI에 넣어보면, 마키아벨리의 논리를 이런 식으로 가져다 쓰기엔 어폐가 있다는 반박이 곧바로 돌아온다.
좋은 일은 군주가 직접 하고 나쁜 일은 부하의 손을 빌리라는 조언 자체는 실제로 《군주론》에 있다. 다만 원전의 그 사례는 정복한 땅을 잔혹하게 다스리던 부하를 훗날 광장에서 처형해 대중의 환심을 사는, 극도로 계산된 정치적 스펙터클이었다. 내각이 정바카라 하나를 장관에게 위임하는 통상적인 국정 운영과는 층위가 다른 이야기다. 예전 같으면 이 비약을 짚어내려면 원전을 직접 읽고 훈련받은 사람이 나서야 했다. 지금은 누구나 몇 초 안에 같은 검토를 할 수 있다. AI가 없애는 건 해석 그 자체가 아니다. 해석이 맞는지 확인하는 데 드는 비용, 그것이 사라졌다.
이걸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왜 유시민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논리로 반박하는 대신 감정적 용어로 낙인을 찍을까. 답은 간단하다. 메시지에 반박할 수 없을 때 남은 선택지는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뿐이다.
해외에서 살아온 경험을 이야기할 때 내가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해외 생활 좀 했다고 잘난 척하냐는 말이다. 시간과 돈이 있어서 가능했을 거란 비아냥도 많다. 하지만 그 반대다. 나는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없었기에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한국 슬롯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삶이 나와는 맞지 않았고, 어차피 한국 슬롯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면 보다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슬롯, 문화를 배우며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싶었다. 선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다. 나는 그 10년이 그저 내 삶이었을 뿐이다. 잘나고 못나고를 따질 필요 없는 내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내 삶과 경험을 그대로 말하는 것만으로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사람들이 '표준'과 '정상'에서 벗어난 삶 또한 가능하고,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걸 존중하면 좋겠다. 이제는 왜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 안다. 이것도 같은 회로다. 내용을 반박할 수 없을 때 남은 선택지는 화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 다르게 살아본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이 슬롯의 기본값이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걸 무심코 폭로해버리고, 그 폭로가 불편한 사람들은 내용 대신 화자를 걸고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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