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스포일러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HOPE》가 베일을 벗었다. 황정민, 조인성, 정호연이 주연을 맡았고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외계인 역으로 출연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기립박수를 받았고, 7월 15일 국내 개봉과 동시에 올해 최다 예매 기록을 세우며 극장가를 장악했다. 나홍진의 영화답게 《HOPE》는 지금, 가장 뜨거운 감자다.
모든 시작은 호랑이로부터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작은 어촌 마을 호포항, 길 한가운데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몸통에 짐승이 할퀸 듯한 자상이 가득한데 살점을 뜯어먹은 흔적은 없다. 배고픈 짐승의 사냥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때 동네 청년 하나가 말한다. 호랑이가 가끔 북에서 내려온다고 해술이 아저씨한테 들었다고. 그러니까 호랑이 짓 아니겠냐고.
"해술이 아저씨가 그렇다면 그런 겨." 그 말 한마디로 마을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출장소장 범석(황정민)은 순찰차를 몰고, 청년들은 사냥을 나서고, 온 마을에 비상이 걸린다.
호랑이는 실체가 없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 누가 봤다더라, 누구한테 들었다더라, 그 전언의 사슬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이름은 온 동네를 잠식한다. 나는 이 호랑이가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굳게 있다고 믿는 것. 호랑이는 짐승이 아니라 관점이다. 그리고 관점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HOPE》를 보는 내내 나를 붙든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무엇을 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여러 번 다른 방식으로 답한다. 첫 번째 답이 바로 이 호랑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 영화 자신이 그 답이 된다.
아무도 호랑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슬쩍 발을 거는 지점이 있다. 극 중반, 그 소문의 출처로 지목된 해술이 아저씨(임현식)가 성애(정호연)에게 자기가 숲에서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는 호랑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다. 자기가 본 것을 본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가 본 건 외계인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근거 없는 헛소문이 퍼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확한 목격이 있었고 정확한 증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증언은 마을을 통과하면서 호랑이가 되었다. 목격자의 입에서 출발한 말이,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이 이미 다른 말로 둔갑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외계인이라는 말은 그 마을이 감당할 수 있는 어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총을 들 수도, 예비군을 소집할 수도, 서로의 공포를 나눌 수도 없다.
반면 호랑이는 다르다. 이미 마을의 서랍 안에 준비되어 있던 위협이다. 북에서 내려오는 것. 우리를 해치는 것.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사건을 그 서랍에 밀어 넣는 순간, 마을은 비로소 공포를 나누고 단결할 언어를 얻는다.
누구의 악의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반사적으로 작동한 번역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위협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대신, 가진 것 중 가장 가까운 서랍을 연다.
그리고 그 호랑이는 나중에 반박되지도, 정정되지도 않는다. 아무도 돌아와서 그때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 크고 실체적인 재앙이 밀려오면서 그냥 조용히 폐기될 뿐이다. 소문은 진실에 의해 무너지는 게 아니라 잊히는 방식으로 사라진다. 애초에 검증받을 필요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다시 나부끼는 반공 현수막
이 마을에는 반공과 멸공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나부낀다. 시대 배경은 1980년대다. 그런데 나는 스크린 속 그 낡은 현수막을 보면서, 극장을 나선 뒤 요즘 다시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떠올렸다.
이 낙인의 문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반공은 늘 국가가 위에서 설계한 언어였고, 실제 위협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군가를 지목해 나머지를 결속시키는 정치적 도구로 쓰여왔다. 순찰차를 몰고 예비군을 소집하던 범석의 모습이, 그 오래된 도구가 마을 단위로 반복되는 장면처럼 보였다.
지난 6월 말 도널드 트럼프는 공산주의를 암에 비유하며 싹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넘었고 미국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는 게 AP통신의 분석인데도, 그는 민주당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인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민주 진영을 친북 좌파로 매도하는 언어가 되살아났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고 이제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시대인데, 미국도 한국도 시대에 안 맞게 다시 반공을 외친다.
호랑이와 빨갱이는 같은 문법을 갖고 있다. 둘 다 실체가 아니라 관점이다. 관점은 충분히 반복되기만 하면 실재를 대신한다. 냉전기의 반공은 애초에 그런 번역 기능을 하도록 설계된 언어였다. 실제 위협이 무엇이든 공산주의라는 틀에 옮겨 담기만 하면 즉각 결속하고 행동할 명분이 생겼다. 《HOPE》 속 호랑이는 그 오래된 번역 기제가 지금도 멀쩡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사소한 시골 마을의 반사작용 하나로 무심코 증언한다.
낙인은 늘 밖을 향하지만은 않는다. 그 낙인이 마을 안에서는 다른 얼굴로 작동한다.
무자비한 우연성
이 마을의 재앙은 은둔하며 살던 목수 양배(음문석)가 산속에서 아기 외계인을 쏴 죽여 냉동창고에 숨긴 데서 시작됐다. 처음엔 인간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피해자로 보이지만, 사실 먼저 남의 자식을 죽인 건 인간 쪽이었다.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동안, 정작 자기들 안에 있던 진짜 원인은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간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범석은 외계인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동네 정육점 주인을 실수로 쏴 놓고 어쩔 수 없었다고 뻔뻔하게 말한다. 대의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건 반공과 멸공을 외치던 전체주의 슬롯에서나 하는 짓이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그러면 안 된다. 그런데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 영화에서도 일어났고. 그러면서도 범석은 외계인 아이의 사체를 자랑하듯 꺼내 보이는 양배를 다그친다. 너 때문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졌다고.
그런데 양배는 반성하지 않는다. 실실 웃을 뿐이다. 그가 진짜로 억울해하는 건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 애지중지하던 사체를 빼앗겼다는 사실이다. 이후 도망치려다 붙잡혀 운전대를 잡고, 마베이요를 쓰러뜨린 순간 고양이가 보인다며 핸들을 꺾어 성기를 차 밖으로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그는 무사하다. 온갖 민폐를 저지르고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다.
범석은 대의라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명분 뒤에 숨어 자기 행위를 정해진 일처럼 취급하고, 그 명분 덕분에 면바카라됐다. 양배는 명분조차 없었다. 반성도, 죄바카라감도 없었다. 그런데도 결과는 같다. 아무도 그에게 값을 치르게 하지 않는다.
이건 명분 있는 폭력과 명분 없는 폭력을 저울질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이 세계에는 저울 자체가 없다는 이야기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지 않는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벌 받는 서사적 필연 같은 건 없다. 이 무자비한 우연성이야말로 나홍진이 계속 말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인생은 통제되지 않는다. 정의도 통제되지 않는다. 그러니 통제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외부인이자, 외국인이고, 외계인, ALIEN
한국에 사는 외국인의 등록증에는 반세기 넘게 ALIEN이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1966년 처음 발급된 외국인거주허가증부터 그 이름이었고, 배타적인 어감이 있다는 지적을 받아 Alien Registration Card에서 Residence Card로 바뀐 건 2021년의 일이다. Alien이라는 단어를 지우는 데 54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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