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에덴의 동쪽》|70년을 사이에 둔 대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필사적으로 땅을 기어 두 형제가 사는 집에 도착한다. 작품의 첫 장면이다. 소설에서는 100쪽을 지나서야 나오는 순간을 이 시리즈는 맨 앞에 가져다 놓았다. 이야기를 어디서 여느냐는 이야기가 누구의 것이냐를 정하는 일이다. 조 카잔은 첫 장면에서 이미 답을 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피투성이 여자로부터 시작한다고.
2026년 10월 1일, 넷플릭스 시리즈 《에덴의 동쪽》, 일곱 편의 에피소드가 한꺼번에 공개됐다. 공개 첫 주말에 영어 TV 부문 세계 1위에 올랐고, 80개국에서 톱10에, 22개국에서 1위에 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으킨 파장은 숫자보다 논쟁에 있다. 그 수많은 소파에서 극 중 여주인공 캐시가 괴물인지, 아니면 기회를 얻지 못한 여자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에덴의 동쪽》 원작은 존 스타인벡이 1952년에 쓴 소설이다. 성경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캘리포니아 살리나스 계곡의 두 가문, 3대에 걸친 이야기로 풀어냈다. 이 소설을 처음 영화로 옮긴 사람이 엘리아 카잔이다. 1955년 영화에서 제임스 딘이 칼 트래스크를 연기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얻지 못한 반항아의 얼굴은 한 시대의 얼굴이 됐다. 딘이 주연한 세 편 가운데 그가 살아서 개봉을 본 작품은 이 영화 하나뿐이다. 그는 이 작품이 개봉한 지 여섯 달 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에덴의 동쪽》은 스타인벡의 소설이기 전에 제임스 딘의 영화로 간직됐다.
할아버지의 영화를 다시 쓴 손녀
이번에 그 이야기를 다시 만든 사람은 엘리아 카잔 감독의 손녀 조 카잔이다. 마흔세 살의 그는 일곱 편의 대본을 썼고, 이 가운데 한 편은 소설가 알렉산더 치와 공동으로 썼다. 열다섯 살에 원작 소설을 처음 읽었고, 20년을 마음에 품었다가 6년을 매달려 작업했다. 할아버지 엘리아 카잔이 1955년에 만든 영화가 원작 소설의 마지막 부분만 가져온 것과 달리 2026년의 넷플릭스 시리즈는 1862년부터 1918년까지를 통째로 다룬다. 한 가문이 70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손녀는 할아버지의 영화에서 빠졌던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1955년의 카메라가 중심에 둔 사람과 2026년의 카메라가 중심으로 불러온 사람은 다르다. 이 다름에는 시대의 변화가 담겨 있다. 나는 아내와 엄마의 자리를 온몸으로 거부한 여자, 그 곁에서 엄마 노릇을 한 외부인, 오랫동안 화면 바깥에 서 있던 여성, 이주민, 비서구권 문화, 비백인의 자리에서 이 작품을 읽었다.
시리즈 초반에 리가 낯선 백인들 앞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영어를 하는 장면이 있다. 억양이 짙고 단어를 끊어 말하는, 백인들이 동양인에게 기대하는 말투다. 그러다 그가 사실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유창한 영어를 쓴다는 것이 드러난다. 많은 시청자에게 이 장면은 통쾌한 반전이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저 서툰 영어를 얼마나 오래 연기해 왔을지가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연기를 해본 적이 있다.
제임스 딘이라는 유령
제임스 딘의 칼은 늘 문 앞에서 서성인다. 아버지의 방 앞에서, 쌍둥이 형제의 그림자 옆에서, 어머니라는 빈 이름 앞에서. 1955년 영화는 이 아들의 상처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영화는 소설의 절반을 훌쩍 지난 곳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관객이 기억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의 얼굴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 영화에도 캐시는 있었다. 그녀를 연기한 조 밴 플리트는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러니 이 인물은 중심에 서지 못했을 뿐 시선을 훔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없었던 사람은 따로 있다. 소설 24장에서 성경 한 구절을 붙들고 이 이야기의 중심 단어를 찾아내는 사람, 리다. 그는 1955년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조 카잔은 칼을 연기한 조셉 지다에게 오디션 전부터 촬영이 끝날 때까지 1955년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다. 이 현장에 제임스 딘이라는 유령이 출몰하게 두지 말자는 이유였다. 유령은 산 사람보다 힘이 세다. 이미 완성된 얼굴이기 때문이다.
엘리아 카잔이라는 거장의 유령
조 카잔이 쫓아내야 했던 유령은 딘 하나가 아니다. 그의 할아버지 엘리아 카잔은 미국 연극과 영화, 연기를 새로 정의한 사람이다. 그러나 1952년 4월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에 증인으로 나가 옛 동료 여덟 명의 이름을 댄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은 반공 열풍인 매카시즘에 휩싸여 있었고, 이름 대기를 거부한 영화인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을 잃었다. 엘리아 카잔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공산당원이었다고 밝혔고, 이 선택으로 많은 친구를 잃었다.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우정도 끝났다. 그 증언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조 카잔은 이 유산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못 본 척하는 방식으로 오래 견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 이 바카라을 향한 사랑이 할아버지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의 두려움과 수치심보다 크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영광과 논란이 섞인 유산 앞에서 그가 고른 것은 부정도 계승도 아니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산과 전통 안에서 살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만든 것이 할아버지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
조 카잔이 스타인벡을 두고 한 말을 곱씹게 된다. 그는 스타인벡이 마음 깊이에서는 휴머니스트, 곧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동시에 20세기 중반 백인 남성의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이 때로 그 휴머니즘을 덮어 버렸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아무리 바르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스스로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지식인도 자신이 여성혐오자나 인종차별주의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휴머니스트라는 자기소개가 여성혐오자나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증명서가 되어 주지 않는데도 그렇다.
스타인벡의 휴머니즘에도 보편을 말하면서 일부를 빼놓는 한계가 있었다면, 21세기의 우리는 20세기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계를 알고서 고전을 다시 읽는 일은 원작을 배신하는 일일까. 조 카잔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자신이 스타인벡의 원작 소설과 크게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는 말에 불편함을 내비친다. 이미 소설에 있던 사람들에게 빛을 비췄을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빠졌던 리도 소설에 처음부터 있던 인물이다. 같은 바카라이어도 시대가 바뀌면 보이는 인물들이 달라진다. 소설이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하는 일은 때로 그 소설이 가장 오래 가려 둔 사람들에게 불을 켜 주는 일이다.
순종하지 않는 아내, 모성 없는 엄마
캐시는 남편 아담을 쏜다. 그리고 갓 낳은 쌍둥이를 두고 떠난다. 줄거리로 쓰면 두 문장으로 끝나는 이 장면이 70년 넘게 한 여자의 평판을 규정해 왔다. 어떤 이들은 캐시가 총을 쏜 것은 아담이 꿈꾸던 캘리포니아 이주를 따르지 않겠다,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선택을 아담이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읽는다. 아내가 되기로 동의한 적은 있어도 그 이름에 딸려 오는 모든 것에 동의한 적은 없다는 이야기다. 떠난 캐시는 케이트가 되어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고, 그 업소의 주인 페이를 독살해 그 집을 차지한다. 그리고 드나드는 유력한 남자들의 사진을 모아 약점으로 쥔다. 그녀가 쥔 것은 돈보다 장부였다.
그렇다면 캐시를 '악녀'로 만든 서사는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조 카잔은 국회도서관에서 당시 《타임》지에 실린 원작 소설 서평을 읽었다. 제목이 ‘신사들과 헤픈 여자들’이었다. 그는 이 제목을 보고 웃으며 ‘작정하고 달려들었네’라고 했다. 70년이 지났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반응이다. 소설 속 여자들을 한 줄로 요약하는 그 제목에 그 시대의 시선과 독법이 다 들어 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모성이 없는 엄마를 악녀로 부르는 이야기는 남성의 권위에 익숙한 사람들이 남성의 언어로 써 온 서사에서 크게 비롯된 것이다. 소설의 화자도, 1955년 영화가 캐시를 업소 주인 케이트로 곁에 세워 둔 방식도 그 서사 안에 있다.
모성 규범을 어기는 여자에게 슬롯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연구와 소설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슬롯학자 오르나 도나스는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 이스라엘 여성 23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이 후회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라는 역할이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은 함께 있을 수 있다. 소규모 질적 연구라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연구가 알려졌을 때 인터넷에는 이 여성들을 차갑고 잔인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댓글이 가득했다.
엄마라면 당연히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요구는 폭력일 수 있다. 감정을 의무로 바꾸고, 그 의무를 어긴 여자를 벌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이 요구를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받아들인 엄마다. 아들을 떠나지 않고 죄바카라감을 끌어안아 슬롯의 비난을 대신 치렀다. 《에덴의 동쪽》 캐시는 이 요구를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은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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