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에게 해석의 권력을 내주지 말자
우리가 떠받든 것들의 정체
인디잡지에서 오래 일했다. 홍대 지하 라이브클럽에서 인디밴드를 취재했다. 공연비 십만 원, 그것도 떼이지 않고 받으면 다행인 무대들. 그 좁고 어두운 객석을 채운 건 수십 명 남짓이었고,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밴드가 자기들만 아는 비밀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밴드가 어느 날 라디오와 TV에 나오고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면, 그들 사이에선 꼭 이런 말이 나왔다. '나만 알아야 하는데.' '인기 얻더니 변했어.' '기껏 키워줬더니 배신하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다. 그들이 정말 사랑한 건 밴드의 음악이었을까, 아니면 그 밴드를 통해 자신이 누렸던 특별함이었을까. 밴드가 세상에 닿을수록 그들의 안목은 희석됐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마음의 정체가 사실은 소유욕이었다는 걸, 그 배신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들은 종종 음악 자체를 핑계 삼았다. 메탈을 하던 밴드가 트로트를 부르면 변절이라 했다. 빅뱅 대성이 트로트 앨범을 냈을 때, BTS 진이 '슈퍼 참치'라는 가벼운 곡을 들고 나왔을 때, 그게 변절이었나. 라디오헤드는 기타 록에서 전자음악으로, 뮤즈와 콜드플레이는 끊임없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음악적 실험을 거듭했다. 그 실험이 그들을 국제적인 스타로 키웠고, 동시에 그들이 발 딛고 있던 밴드 신 전체를 더 오래 살아 있게 만들었다. 밴드가 자라기를 거부하고 한 장르 안에 박제되어 있었다면, 그 신은 진작 말라 죽었을 것이다. 결국 '변절'이라는 말의 정체는 음악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장르가 자기 취향이 아니게 됐다는 데서 오는 투정에 가깝다.
요즘 한국 슬롯를 보고 있으면 그 라이브클럽이 자꾸 떠오른다. 다만 무대가 훨씬 커졌을 뿐이다.
카르텔은 위에서 만들어지고 아래에서 완성된다
지난 6월 3일 지방선거, 경기 평택을. '국민의힘 제로'를 공언하던 조국 조국혁신당 후보는 민주당 김용남 후보와의 단일화를 끝내 거부하고 완주했다. 결과는 국민의힘 유의동 후보의 어부지리 당선이었다. 김용남 후보가 2위, 조국 후보가 3위. 두 사람의 득표를 합치면 당선자를 가볍게 넘어서는 표였다. 범여권의 표를 둘로 쪼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조국 자신의 선택이었다.
흥미로운 건 패배 직후 조국이 남긴 말이다. "이번 결과는 저의 실패이지, 여러분이 저에게 투영했던 비전과 가치가 틀린 건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실패는 자기 몫으로 돌리면서도, 그 실패를 낳은 판단의 정당성만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화법이었다. 바카라임지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아무것도 바카라임지지 않는 이 언어를, 우리는 정치뿐 아니라 슬롯 곳곳에서 너무 자주 들어왔다.
얼마 전 유시민은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 자신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강행하라고 직접 조언했다고 밝혔다. 검찰이라는 반란 조직의 수장에게 대통령이 무릎을 꿇으면 진영 전체가 무너진다는 논리였다고 했다. 민주 진보 진영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정권 재창출 실패의 시초가 자신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셈인데, 그의 표정에는 후회나 부끄러움 대신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신념이 이성을 지배해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왜 그는 그 자백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무용담으로 풀어냈을까. 답은 간단하다. 조국 임명이 실패였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조언을 한 자신의 판단력 전체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았다고 믿기 위해 조국이 끝까지 옳아야 했다. 그가 지키려 한 건 조국이 아니라 유시민,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의 뿌리를 더 깊이 캐보면, 거기엔 더 오래된 전유가 있다. 유시민과 조국을 비롯한 민주당 운동권 686 세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민주화를 이룬 세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 엄마, 아빠, 이모, 고모, 삼촌, 평범한 얼굴들 모두가 함께 만든 역사였다. 누군가는 거리에서 돌을 던졌고, 누군가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뛰어가는 자식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그저 그 시절을 견디며 살아냈다. '민주화'라는 이름은 그 모든 평범한 이들의 몫이었는데, 정작 그 타이틀을 깃발처럼 들고 권력과 자리로 바꿔 간 건 소수의 엘리트 운동권이었다. 공공의 성취를 사적인 자산으로 전유하고, 그 전유를 도덕적 우위로 포장하며 권력을 획든했다. 그리고 이 슬롯의 엘리트 기득권이 되었다. 이게 바로 정치든 체육이든 언론이든, 카르텔이 반복해온 가장 오래된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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