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옆에는 아무도 없을 수 있다

비주류 대통령의 증명 모드

by조하나



12·3 내란 이후 두 번째 겨울이 오고 있다. 내란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는 밤들이 이어졌고, 결국 윤석열은 파면됐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그로부터 1년 3개월이 지났다.



이재명 정부의 시간들을 지켜봤다. 집권하자마자 대통령 길들이기를 하려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 내 기득권, 김어준과 유시민과 조국으로 상징되는 카르텔 세력이 본색을 드러냈다. 조국 사면,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검찰개혁 보완수사권, 중수청장 임명. 고비마다 저들은 각을 세웠고, 그때마다 대통령은 끝까지 인내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추석 연휴를 앞둔 2026년 9월 18일의 기자회견이었다. 그런데 저들은 이재명 정권이 얼마나 우스운지, 다음 정권을 국민의힘에 내주는 한이 있어도 이재명만은 망가뜨리겠다는 태세를 풀지 않았다.



사실 이 흐름은 이미 감지됐다. 김어준 카르텔이 가장 돈벌이가 잘 됐던 시기는 12·3 내란 정국,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인간과 대중의 집단 심리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그때 생각했다. 저들은 이 분노와 혐오가 모일 다음 타겟을 어떻게든 만들어 분노 비즈니스를 이어갈 거라고. 그리고 그 타겟이 곧 이재명 대통령이 될 거라고. 왜냐하면, 이재명은 변방의 비주류였고, 그런 그가 권력을 쥐자 자신들이 쥔 걸 내놔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피해의식과 열등감까지 뒤섞인 이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슬프게도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 글은 그 답답함의 정체를 파헤쳐 보려는 시도다. 왜 성과를 내도 이재명 정부는 공격 받는가. 왜 그 공격은 하필 '보수'도 아닌, '민주'와 '진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가. 비주류 출신 대통령은 왜 이렇게까지 외로운가. 그리고 이 모든 답답함 속에서도 왜 희망을 놓을 수 없는가. 여기서 하나씩 풀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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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대통령 이재명의 증명 모드



이재명은 학벌도 인맥도 든든한 집안 배경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성과였다. 일을 해서 결과로 보여주는 것. 그게 그의 습관이 됐다.



그런데 이 습관에는 서글픈 역설이 숨어 있다.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결핍이 실력을 만들었는데, 그 실력을 만든 결핍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는 거꾸로 결여가 된다. 슬롯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배 집단이 자기들의 자의적인 자산, 그러니까 학벌이나 인맥이나 말투 같은 것을 마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인 것처럼 내세우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성취는 은연중에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고 말했다. 이재명의 성공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서울대 법대도, 정통 코스도 밟지 않고 권력의 정점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평생 그 코스를 밟아온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쌓아온 질서가 흔들리는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윤석열에겐 한 마디도 못했던 유시민, 조국, 조희대, 한동훈, 장동혁, 나경원 등이 지금 이재명 정부에선 달리 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재명은 한국 슬롯에서 늘 이중의 덫에 걸려 있었다. 당대표 시절에도, 성남시장 때도, 경기도지사 때도, 대선 경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세게 공격하면 출신이 그래서, 근본이 없어서 저런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렇다고 참으면 호구가 됐다. 둘 다 결국 비주류라는 꼬리표로 돌아왔다. 세게 나가도 비주류라서, 물러서도 비주류라서. 선택지가 처음부터 좁았다.



이재명에게 세력이 없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정치학자 기예르모 오도넬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통령을 연구하며, 강력한 정당 조직 없이 대중의 직접적인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 결국 제도와 직거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페루의 후지모리, 브라질의 콜로르가 그런 경우였고, 끝이 좋지 않았다. 이재명이 처한 조건도 닮았다. 그는 당내에 자기 세력이 없다. 현재 161명이나 되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권력은 더 이상 얻어먹을 게 없는 처지, 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당장 2년 후 총선에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이나 최욱의 매불쇼에 나가 후원금을 채우고 민주당원의 몰표를 받아 경선에서 승리하는 길이 더 침을 흘린다. 이렇듯 이재명 대통령이 누군가에게 진 빚이 없다는 건 도덕적으로는 가장 깨끗한 조건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조건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 세력은 서로 빚을 주고받으며 묶이는데, 이재명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고 올라왔으니 그를 지켜줄 이해관계의 그물 자체가 얇다.



이재명의 길이 꼭 밝다고만도 할 수 없다. 브라질의 룰라를 보면 알 수 있다. 룰라는 메넴이나 후지모리와 달리 노동자당이라는 조직을 수십 년에 걸쳐 직접 만들었고, 그 덕에 임기 중 파국은 겪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노동자당이 흔들리고 있다. 2026년 10월 대선에서 보우소나루의 아들과 사실상 초접전을 벌이고 있고, 지지율도 임기 중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노동자당이 룰라 이후 세대를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직을 만든 사람 개인에게 당이 여전히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제도를 만드는 일과, 그 제도가 한 사람 없이도 굴러가게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룰라의 지금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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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이 본 증명 모드의 정서



개천에서 난 용은 매번 증명해야 한다. 학벌도 인맥도 배경도 없으니, 실력 증명 없이 그냥 통과되는 길이 없었다. 이재명은 어렸을 때부터 그 길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건 철저히 행정가의 자질이다. 대통령이라는 국가 상징,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대통령에 요구되는 모습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신화적인 면이 있다. 여전히 한국 슬롯의 많은 이들이 대통령에게 왕과 부모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유능함만큼이나 여유와 기품은 물론, 동시에 왕과 같은 권위적인 모습이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어버이처럼 국민을 정서적으로 품는 능력을 바라는 민중도 많다. 만약 이재명이 원래 있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 눈치 보지 않고 구김없이 살았다면, 사람들은 아마 그를 덜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행정가로서의 실력과, 악착같이 증명해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삶의 절박함에서 나온 그 성실함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있다. 선의 없이 움직이는 쪽이 전략적으로는 늘 유리하다. 죄바카라감이나 양심의 제동이 없는 쪽은 더 빠르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선의를 가진 쪽은 더 많은 걸 참아야 한다. 이재명이 김어준 카르텔에게 그렇게 오래 인내한 것도, 순진해서가 아니라 선의가 통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통하지 않는 판에서, 혼자 그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증명 모드에 갇힌 대통령이 12·3 내란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1년 3개월을 온전히 쏟아부었다. 오직 성과와 결과를 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국민이 그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 믿고,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시절 해오던 방식 그대로 한 것이다. 그런데 12·3 내란 이후 국민들 마음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그 상처가 그대로인데, 이재명 대통령은 마치 압축성장 시대의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몰아붙이며 가자, 가자,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트라우마를 겪은 직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먼저 안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증명으로 자기를 입증해온 사람은 본능적으로 재건과 성과로 그 자리를 메우려 든다. 내가 더 열심히 해서 나라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면 그게 곧 치유라는 논리를 믿었을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 입은 민중에게 필요한 순서는 반대일지 모른다. 먼저 살풀이를 하고, 그다음에 재건으로 넘어가는 것.



이 또한 결핍에서 나온 패턴이다. 어릴 때부터 정서적으로 보살핌 받아본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정서적 돌봄이라는 언어 자체가 낯설 수 있다. 나 역시 직접 경험했기에 잘 안다. 자기가 받아본 적 없는 걸 남에게 주기는 어렵다. 압축 성장 시대 아버지들이 자식을 다그친 것도 비슷하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명도 비슷하게, 국민을 아끼는 방식이 더 나은 성과로 보여주겠다는 쪽으로만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더 아픈 지점이 있다. 국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대통령에게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핍은 보통 숨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결핍을 딛고 올라간 사람이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자기 안의 열등감이나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게 불편하니까 차라리 깎아내리는 쪽을 택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이건 비주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기 싫은 회피에 더 가깝다.



이 자리에서 일본에서 재일코리안으로 살아온 슬롯학자 강상중의 경계인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강상중은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존재가 오히려 양쪽의 구조를 동시에 꿰뚫어볼 수 있는 자리에 선다고 썼다. 나는 비주류다. 그래서 일찌감치 주류와 나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선 안에서 나는 안전했다. 그런데 이재명은 비주류로 출발해서, 주류와 비주류를 모두 끌어안는 정치와 행정을 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선을 긋고 생존했고, 이재명은 선을 넘나들며 공익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나는 이재명이 나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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