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을 며칠 앞둔 밤이었다. 편집실에 혼자 남아 원고를 만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고 21기 동기회 송년 모임 안내. 회비는 얼마, 장소는 어디. 열어본 김에 끝까지 읽고 껐다. 십 년 넘게 한 번도 안 나간 모임이 해마다 이렇게 찾아온다. 끈질긴 건 인맥이 아니라 명단이다. 그 학교 이름 석 자가 잠깐 화면에 남았다. 80만 원짜리 에디터의 이력서 맨 윗줄에 아직도 그 학교가 박혀 있다. 유일하게 반짝이는 줄이다. 나머지는 다 찌그러져 있어서.
성적순으로 고등학교를 갈라 뽑던 시절이었다. 중학교까지 나는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전교에서 노는 애였다. 우리 집은 학원에서 돌아온 애를 맞아 줄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왔다. 빈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버릇이 든 게 중학교 때였다. 딱히 공부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집에서 달리 시간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시험을 치러 가던 날 아침에도 엄마와 아빠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시고 공복으로 혼자 집을 나섰다. 시험장 앞에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많았다. 그 풍경을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혼자 여기까지 왔다는 기분이 오히려 좋았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붙던 날, 그 소식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은 밤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피곤하다고 했고, 잘됐다고 했고, 그게 다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잘됐다고 했으니 잘된 거라고. 잠깐은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입학식 전까지는.
반 배정을 받고 처음 며칠, 나는 내가 어디 와 있는 건지 조용히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한 바퀴 돌고 온 얼굴들이었다. 수업에서 선생이 처음 꺼내는 내용을 걔들은 어딘가에서 이미 배워 온 거였다. 나한테 새 내용이 걔들한테는 복습이었다. 쉬는 시간에 오가는 말들, 방학 때 어느 단과를 들었다, 누구한테 과외를 받는다. 나는 그 말들을 들으며 천천히 입을 닫았다. 못 끼어서가 아니라 끼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서였다. 어느 날 같은 반 애가 나한테 모르는 문제를 물어봤다. 학원을 안 다니는 내가 부럽다고, 그 애는 말했다. 부럽다는 말이 어떻게 저렇게 가벼울 수가 있는지. 자기 자리를 내놓을 마음은 없으면서 남의 자리를 부러워하는 것. 그 거리를 나는 그날 처음 쟀다. 그리고 그 거리가 좁혀질 일은 없겠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교실에서 구경꾼이 됐다.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복습 현장을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 그게 싫지는 않았다. 구경꾼은 지지 않으니까.
학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건 그 즈음이었다. 중학교 때 붙어 다니던 애들이 죄다 다른 학교로 흩어지고, 나는 그 애들을 따라 이쪽저쪽 골목을 기웃거렸다. 학교 같은 건 진작 놓아버린 무리였다. 다음 시험이 언제냐, 성적이 어떻게 됐냐, 그런 말은 없었다. 대신 다른 말들이 있었다. 야 너 오늘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사소한 말들이었다. 그 사소함이 낯설었다. 내가 없는 걸 누가 알아챈다는 게, 처음엔 계속 어색했다. 집에선 내가 밤에 들어오든 말든 먼저 자는 사람들이었고, 학교에선 내가 일주일을 빠져도 출석부에 빗금 하나가 늘 뿐이었으니까.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번은 며칠 안 나갔더니 그 무리 중 하나가 우리 집 앞까지 왔다. 뭐 있었냐고, 별일 없냐고 물었다. 별일 없다고 했다. 걔는 그래, 하고 그냥 갔다. 짧은 대화였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았다. 내가 며칠 안 보이는 걸 누가 알아채고 찾아왔다는 게.
한 달에 한 번 모의고사를 봤다. 성적은 복도 벽에 나붙었다. 숫자로 등수를 박아 거는 학교였다. 1학년 첫 시험엔 내 이름이 위쪽에 있었다. 그다음 달엔 조금 내려갔다. 그다음 달엔 또 내려갔다. 나는 제자리걸음을 했는데 남들이 계속 올라오는 식이었다. 복도 벽 앞에 서서 내 이름을 찾는 일이 어느 순간부터 귀찮아졌다. 찾으나 마나 거기 있으니까. 내려가는 자리에. 어느 달부터는 아예 안 찾았다. 찾지 않으면 내려간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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