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20세기 유시민이여

내가 아둔했거나, 당신이 속이는 데 능했거나

by조하나







백바지를 입고 국회에 나타난 사람



2003년 4월, 한 남자가 흰 바지를 입고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짙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의원들 사이에서 캐주얼 재킷에 노타이, 그리고 백바지. 그 옷차림 하나에 본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퇴장시키자"는 고성이 쏟아졌고, 결국 국회의장은 "모양이 좋지 않다"며 선서를 다음 날로 미뤘다. 옷 한 벌 때문에 의원 선서가 무산되는 초유의 일. 그 남자가 유시민이었다.



그 장면을 기억한다. 검은 정장을 입어야만 국민을 대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복장에 위계를 새기고 그 위계로 권위를 지키려는 아재들 한가운데서, 그 모든 걸 비웃듯 흰 바지 한 벌로 걸어 들어온 사람. 나는 잠시나마 생각했다. 저 사람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저 사람이라면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그 백바지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를 가장 끔찍하게 괴롭혔던 열린우리당 내부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김영진 의원의 말처럼, 한국 정치사의 실패한 역사 중 하나인 '백바지 대 난닝구' 논쟁, 그 분열의 핵심 세력 한가운데 유시민이 있었다.



'백바지'와 '난닝구'는 각각 하나의 사건에서 태어났다. '백바지'는 유시민의 첫 등원 복장에서 유래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친노 개혁파의 상징이 되었다. '난닝구'는 같은 해 민주당 사수파 당원 한 명이 러닝셔츠 차림으로 당무회의에 난입해 주먹을 휘두른 사건에서 나왔다. 기존 민주당을 지키려 했던 실용파, 구 민주당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백바지' 세력은 이들을 향해 '지역주의에 기댄 반개혁적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몰아붙였다. '개혁이냐 실용이냐'는 노선 투쟁으로 비화되었고, 그 결과가 열린우리당 의원 150명의 분열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반부터 자기 당 안에서 소모적인 주도권 싸움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동안,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노무현의 선거 개입 발언을 빌미로 탄핵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백바지'에 의해 '반개혁적'이라 몰렸던 호남 정치 세력들은, 탄핵 당시 노무현을 방어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분열이 스스로를 무너뜨렸다.



노무현 탄핵의 본질에 유시민이 있다. 옷의 위계를 거부했던 사람이, 끝내 자기만의 유니폼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입으라 강요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초래한 분열과 갈등, 상대를 업신여기고 비하하고 조롱하던 강한 어조의 말들은 민주 진보 진영에 큰 상처만 남겼다. 거기에 대해 유시민이 바카라임을 졌는가. 아니, 그는 노무현 서거 후 '친노' 완장을 차고 아주 오랫동안 노무현 재단을 맡아 운영하며 '친노'의 얼굴이 되었다.



23년이 지난 지금, 그가 'ABC론'으로 지지자들을 가치 그룹과 이익 그룹으로 나눠 등급을 매기고 낙인을 찍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 백바지를 다시 떠올린다.





멸칭을 이용하는 데 능숙한 유시민



우리 슬롯에 '2찍남'이라는 멸칭이 있다. 2022년 대선 직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 단어가 산발적인 인터넷 은어에 머물지 않고 한 시대의 언어가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다. 유시민이 김어준의 방송에 나와 그 말에 호응하고 의미를 부여하던 그 장면이다. 그는 말했다. '1번남'은 자기가 1번남이라 말할 수 있지만, '2번남'은 자기가 2번남이라 말할 수 없다고. 분류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 패턴을 기억해두자. 그는 '비평가'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빌려 우리 슬롯에 멸칭이 퍼지는 데 공인해왔다. 김어준, 최욱 같은 대형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지성과 영향력, 권위를 실어 떠도는 말을 한 시대의 공용어로 만든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사람들을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는 데 쓰인다.



2026년 3월, 그는 매불쇼에 나와 난데 없는 'ABC론'을 펼쳤다. 민주당 지지층을 가치를 중시하는 A그룹, 이익을 추구하는 B그룹, 그 교집합인 C그룹으로 나눴다. 특정 정치인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누가 B인지를 지목했다. 사람들은 그 특정 인물들을 찾아가 집단 린치를 가했다. 그 뒤로 모든 언론과 지지자들이 서로를 ABC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같은 진영 내에서 상대를 구분지어 부르는 멸칭이 일상어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2026년 6월 26일 금요일, 이재명 정부 출범 1년이 갓 지난 시점, 김어준의 <다스뵈이다> 400회 특집에 유시민이 출연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젊은 평론가에게 '용역 평론가', '촉법 평론가'라는 새로운 멸칭을 선사했다. 지성과 비평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다는 인물이 간밤에 저 비루한 단어들을 떠올리곤, 그걸 수첩에 꾹꾹 눌러 적으며 얼마나 좋아했을지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그리고 유시민은 그들의 배후에 이재명 대통령이 있다고, 이재명 대통령과 지지자들을 한 데 묶어 '작전 세력'이라 지목했다. 지난번엔 '간첩'이라고도 했던, 같은 세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방송이 공개된 바로 그날부터, 사람들은 신진 평론가들에게 '촉법'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분열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무기를 심어놓고 손을 떼면, 그다음부터는 사람들이 그 무기를 가지고 알아서 서로를 죽인다. 정치학에서 '디바이드 앤 컨커(분할 통치)'라 부르는 오래된 기술이다. 그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가장 쓰린 대목은 따로 있다. 그가 '재래식 언론'이라는 말로 레거시 미디어를 민주 진보 진영으로부터 영원히 등 돌리게 만든 곳도 바로 김어준과 최욱의 유튜브 방송이었다. 유시민이 직접 기성 언론을 악마화하고 특정 뉴미디어 권력에 스스로 올라타, 그 위에서 진영을 가르는 언어를 공급하는 것이다.



그는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정치를 쉰 적이 없다. 수많은 정당을 거치고, 선출직 선거에서는 끝내 선택받지 못한, 욕망 가득한 정치인이다. 그런데 우리 슬롯는 여전히 그를 우아한 비평가로 대우한다.





인사청문회를 요구한 사람이 인사청문회 1호가 되었다



그의 모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의 정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구조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출마해서는 안 된다며 세대교체를 주장했다.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인사청문회와 특검제 공약을 집권하자마자 폐기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스맨만 중용한다,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라"고 대통령에게 공개 칼럼까지 썼다. 여기서 잠깐,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젊고 피 끓는 유시민에게 애송이 '촉법' 평론가라고 모욕을 줬을까. 아니. 유시민은 김대중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런데 훗날 장관 인사청문회가 실제로 도입되었을 때, 그 첫 번째 적용 대상자가 바로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 유시민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청문회는 정확히 제 기능을 했다. 국민연금을 관할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작 국민연금을 1년 이상 미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건강보험료도 피부양자로 불법 등재해 내지 않았다는 사실도. 자신이 박사라고 오래 기재해왔던 학위가 실제로는 석사였다는 사실도. 그런데 그 청문회를 앞두고 유시민은 불만을 표했다. 권력의 바카라임을 묻는 장치를 요구했던 사람이, 그 장치 앞에 서자 불편해했다. 인사청문회는 그가 원했던 대로 작동했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냈다.


유시민이 이런 저런 학자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하니 나도 한 번 해보자.


독일의 슬롯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이것을 '과두제의 철칙'이라 불렀다. 아무리 민주적인 이상을 품고 출발한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소수 엘리트의 권력 독점으로 귀결된다는 법칙이다.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끝내 그 조직 자체를, 그 안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국의 386 운동권 기득권이 정확히 이 경로를 밟았다. 그리고 유시민은 그 철칙의 가장 또렷한 표본이다. 개혁을 외치던 사람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게 모두의 눈에 보이는데, 본인만 모른다.



그의 언어에는 언제나 권위주의식 서열이 있다. "나는 가치를 중시하는 A야. 너희는 이익을 추구하는 B지. 내가 너보다 위야." "나는 고매한 비평가야. 너희는 뭣모르는 애송이 촉법 평론가지. 내가 너보다 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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