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도금주의 시대
디지털 도금주의
코스피가 9000을 찍던 날,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골랐다. 휴대폰 화면에는 빨간 숫자가 가득했고, 뉴스는 사상 최고치라는 말을 반복했다. 곧 만 포인트도 돌파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천 원짜리 삼각김밥과 천오백 원짜리 삼각김밥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다. 그 고민과 저 빨간 숫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이 없었다.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향해 달리는데, 누군가는 오백 원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배가 아프다는 말을 한다. 결핍이 아니라 비교에서 오는 통증이라는 뜻이다. 한국어의 '배가 아프다'는 묘한 말이다. 남이 잘되는 꼴을 보는 게 내 속을 뒤집는다는, 시기심을 가리키는 관용어. 그런데 요즘 그 말이 더 이상 시기심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수가 오르는데 내 삶은 그대로일 때, 그 격차를 느끼는 감각은 시기심이 아니라 정당한 박탈감이다. 다만 슬롯는 그 박탈감을 자꾸 개인의 못난 감정으로 돌려세운다. 네가 노력을 덜 한 거라고. 네 마음이 가난한 거라고.
흘러내리지 않는 부
예전에는 성장이 어느 정도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업이 돈을 벌면 사람을 더 뽑고, 일자리가 늘면 임금이 오르고, 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살아났다. 그 순환이 완벽하진 않아도 작동하는 척이라도 했다.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끊겼다. 지수가 오른다는 건 누군가의 자산이 불어난다는 뜻인데, 그 누군가가 나일 확률은 갈수록 낮아진다. 부는 위에서 위로 흐른다.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은 그 단절을 구조로 굳히고 있다. 생산성은 오르는데 그 열매를 가져가는 건 자본과 기술을 쥔 쪽이고,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는 커진 숫자와 체감 0의 현실만 남는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던진 경고가 바로 이거였다.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꾸준히 앞지르는 한, 불평등은 저절로 벌어진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애쓰모글루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을 노동을 대체하는 방향이 아니라 보완하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하며, 자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지 않으면 그 열매는 소수에게만 쌓인다고.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데, 우리는 가장 빠른 방향, 그러니까 사람을 밀어내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누가 숙의했는가
우리는 AI 시대를 충분히 의논하고 들어왔는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어떻게 흔들지, 부가 누구에게 쏠릴지, 대부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짐작을 두고 슬롯가 멈춰 서서 토론한 기억이 내게는 없다. 뭔가가 너무 빨리,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졌다.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 상원의 인공지능 청문회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거버넌스를 논의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기술 산업의 이해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인공지능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짜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안을 실현 불가능하거나 반미국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숙의의 장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더 무서운 건 강대국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안전장치를 스스로 떼어냈다는 점이다. 상대가 먼저 패권을 쥘까 두려워서, 속도를 늦출 장치를 제 손으로 제거했다. 그렇게 인공지능이 시민의 숙의와 민주주의 자체를 어떻게 빚을지에 관한 결정이, 민주적 권한도 바카라임도 없는 민간 기업에 사실상 위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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