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주인이 되는 법

번역되지 않는 언어로 건넨 가장 보편적인 위로|영화 《세계의 주인》

by조하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자동세차기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는가. 차가 컨베이어에 얹혀 천천히 끌려 들어가고, 거대한 솔이 돌아가고, 물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 몇 분. 차 안에 앉아 있으면 세상의 소리가 전부 지워진다. 물소리와 펌프 소리, 고무 롤러의 진동만 귓바퀴를 먹먹하게 채운다. 바깥에서 보면 그저 세차 중인 차 한 대일 뿐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 열여덟 살 주인은 바로 그 자동세차기 안에서 처음으로 무너진다. 엄마가 운전석에, 주인이 조수석에 앉아 있다. 물이 쏟아지고 솔이 돌아가는 동안, 주인은 그동안 눌러 담았던 것을 토해낸다.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소리는 세차장의 소음에 묻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한다. 표현은 일어났는데, 들리지는 않는다.



이 장면을 오래 생각했다. 고통은 본래 사적인 감각이다. 내 아픔이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는 나만 안다. 그것이 언어가 되어, 소리가 되어, 누군가의 세계에 가닿을 때에야 비로소 슬롯적인 사실이 된다. 영화 속 세차장 씬은 그 역설을 한 컷으로 보여준다. 가장 큰 소리로 외쳤지만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리. 주인이 그동안 살아온 자리가 바로 거기였다는 것을,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그때 엄마가 한 말은 단 한마디다. "한 바퀴 더 돌까?"



엄마는 묻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그만 울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 먹먹한 공간에 조금 더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대사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장면에서 주인은 엄마에게 다른 말도 한다. '엄마면 알아봤어야지.' 사랑받았다는 것과 이해받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곁에 있다는 것이 자동으로 알아챔을 뜻하지는 않는다. 엄마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주인의 아픔이 끝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오랜 혼자였음이, 소리가 묻히는 그 공간에서 마침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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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라는 이름에 숨은 세 겹의 뜻



이 영화는 언어 자체가 소품인 영화다. 번역하는 순간 한 겹이 반드시 떨어져 나간다.



주인공의 이름은 '이주인'이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세계의 주인'이다. 한국어에서 '주인'이라는 단어에는 적어도 세 겹의 뜻이 포개져 있다. 첫째, 무언가를 소유한 사람, 영어로 'Owner'다. 둘째, 주인공의 이름 그 자체다. 셋째, 한자를 바꾸면 '이주인(移住人)', 즉 이주해 온 사람이 된다. 고통스러운 과거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온 사람이라는 뜻이 거기 숨어 있다.



그러니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은 한국어 안에서 동시에 여러 말을 한다. 주인이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자, 자기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 되라는 선언이자,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온 사람의 기록이다. 이 다층의 울림은 한국어 바깥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윤가은 감독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영어 제목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고, 언론시슬롯에서 직접 밝혔다. "한국어로 '주인'이라는 의미인 무언가를 소유한 사람, 실제 주인공의 이름으로 잘 번역이 안 되더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영화를 다 만들고 영제를 지었다." 그렇게 나온 영어 제목이 《The World of Love》, '사랑의 세계'다. 감독은 말했다. "주인이가 사랑의 세계를 끝도 없이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제목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어 제목은 '네가 네 세계의 주인이다'라고 말하고, 영어 제목은 '그 세계가 사랑으로 지어져 있다'고 말한다. 같은 영화의 두 가지 진실이다. 그리고 이 영어 제목은 윤가은의 전작과도 이어진다. '우리들'의 영어 제목은 《The World of Us》였고, '우리집'은 《The House of Us》였다. Us에서 출발해 Love로 나아가는 삼부작이 그렇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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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싫어하는 아이, 그리고 끝내 오지 않은 사과



이 영화에서 언어가 소품이 되는 또 하나의 자리가 있다. 사과다.



영화에서 주인은 사과를 먹지 않는다. 담임이 권해도, 친구들이 권해도 거절한다. 영화는 끝까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이렇다. 가해자가 주인에게 보내온 편지의 발신지가 청송 교도소이고, 청송은 사과가 특산물인 지역이다. 사과 한 알이 그 사람을 불러온다.



그런데 한국어는 여기에 한 겹을 더 얹는다. 한국어에서 과일 사과(沙果)와 사죄를 뜻하는 사과(謝過)는 소리가 같다. 주인이 끝내 받지 못한 것, 가해자에게서 단 한 번도 오지 않은 것 역시 사과다. 영화가 주인의 과거를 한 번도 화면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 사과(謝過)의 기억은 완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과일이면서 동시에 사죄인 이 단어 하나가, 침묵 속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말한다.



영화는 주인이 어린 시절 겪은 피해를 단 한 번도 화면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플래시백도, 재현도 없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에서 오래된 질문이 있다. 성폭력을 화면에 담는 카메라는, 그 폭력을 다시 반복하는 시선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보여주는 행위 자체가 관객을 가해의 자리에 앉히지는 않는가. 윤가은 감독은 주인의 성폭력 피해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 물음에 답했다. 관객은 주인의 과거를 들여다볼 수 없다. 가해의 순간을 소비할 수 없다. 대신 그 기억의 무게를, 사과를 거절하는 손짓으로, 세차장에서 묻히는 소리로, 끝내 오지 않은 사과(謝過)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를 선택하는 것이 곧 윤리가 되는 연출이다.



이 지점에서 동생의 이야기가 포개진다. 주인의 남동생 해인은 마술을 한다. 세상의 모든 걱정과 고민을 없애주겠다는 마술. 그런데 그 마술은 무언가를 감추는 마술이다. 동생이 몰래 숨겨온 편지가 있고, 그 발신지가 청송이라면, 동생의 마술은 가해자의 존재 자체를 가족의 일상에서 지우려는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마술이 들통나는 순간은 그 편지가 드러나는 순간이고, 사과(謝過) 한마디 없이 편지를 보내오는 가해자가 아직 이 가족의 삶 안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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