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정치 유튜브 채널은 잠시 불안을 잠재울 뿐.
2024년 12월의 밤은 길었다. 비상계엄이라는 네 글자가 자정에 가까운 시간, 한 나라의 밤하늘에 퍼진 뒤로, 나는 여러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충격과 불안으로 심장이 두근거렸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불안과 공황에 시달렸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잠들기 전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켰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최욱의 매불쇼, 오창석의 사장남천동 같은 프로그램들을 순회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빨랐고 확신에 차 있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 분명했다. 그 분명함이 좋았다. 안심이 됐다. 불안으로 헐떡이던 나에게 그 방송은 진통제였다.
강한 사람인 척했지만, 그 겨울의 나는 그저 마음 둘 곳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무서웠고, 화가 났고, 그 무서움과 화를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매일 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당신이 옳다, 저쪽이 틀렸다, 이유는 이렇다'라고 말해주는 일. 그게 필요했다. 그 시기의 불안과 분노가 부당한 감정이었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헌정 질서가 무너진 밤이었으니까. 정당한 감정이었기에, 나는 내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더더욱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진통제가 천천히 나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길을 걷다 이십대 청년을 보면 속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어휴, 저 생각 없는 극우들.' 그 청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한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그를 '이대남 극우'로 분류하고, 판결하고, 내 세계 바깥으로 밀어냈다. 나와 같은 의견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겨울, 나는 내가 가장 경멸한다고 믿었던 바로 그 마음의 형태를 닮아가고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방송을 껐다. 그리고 당시 내가 썼던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집단화하고 악마화하고 재단하고 조롱, 비하하는 멸칭을 쓰지는 않았는지, 조롱을 농담으로 포장하지는 않았는지, 내 문장이 누군가에게 칼이 되지는 않았는지. 쓰는 언어가 생각을 강화한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증명했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또렷한 증상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시기 우연히 양쪽 패널을 함께 부르는 이른 바 중립적인 공중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을 틀면, 나는 반대편 사람의 말을 듣기 싫은 걸 넘어서 아예 견디지 못했다. 싫은 것과 못 견디는 것은 다르다. 싫은 건 취향이지만, 못 견디는 건 이미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반대 의견이 들리는 순간 명치께가 답답해지고 채널을 돌려버리고 싶어지는 상태. 내 뇌는 어느새 '반대 의견은 위협'이라고 학습한 상태였다.
김어준, 최욱, 헬마우스, 이동형 등의 유튜브 방송들의 포맷이 정확히 그 학습을 시킨다. 그들은 애초에 반대편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 맺는다. 청취자는 동의하는 목소리만 듣고, 반박은 진행자가 알아서 처리해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 사람은 다른 의견 자체에 생리적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정보를 얻는다고 믿는 동안,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면역의 상실이다. 이들 방송은 진통제가 아닌 마취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 마취제에 중독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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