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를 흔들며 4.19를 외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말을 훔친 사람들

by조하나

2026년 6월 3일 밤,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투표가 끝나고 투표함을 반출하려는 선관위 직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태극기도 아닌 성조기를 흔들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한국에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외쳤다. 자신들이 곧 "나라를 지킨다"고 했고, "이것이 4.19 혁명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 장면을 한국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으로서, 그리고 다시 한국 땅을 밟고 사는 사람으로서 동시에 바라보았다. 해외에서 "한국 어때요?"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으며, 한국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서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나라의 어떤 장면들이 외부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그날 밤, 나는 외국 친구들이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 "너희들 선거가 잘못되었는데, 대체 저 미국 국기는 뭐야?"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나도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과격한 말, 거친 은어를 쓴 적이 있다. 그 말들이 나를 더 세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고, 또래 안에서 소속감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언어가 무엇인지 몰랐다.


기자를 했고 작가를 하고 있다. 말과 글을 업으로 다루면서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도 틀린 것이 없었다. 사람은 사유하는대로 말하고, 말하는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대로 현실을 만들어 간다. 어떤 말을 반복해서 쓰는 사람은 결국 그 말이 가리키는 세계 안에서 살게 된다.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는 곧 그 사람이다. 언어는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누군가를 위협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쓰는 사람은, 그 언어로 자신의 내면을 그 방향으로 빚어가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만의 단단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가지려는 사람은, 그 언어로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매일 조금씩 다듬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쓰는 언어만큼 자란다.


잠실에 모여 시위를 하며 근처 시민들과 경찰관, 언론인, 선관위 실무 직원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사람들도, 일베 언어를 자랑스럽게 쓰는 이들도 처음에는 그 말이 주는 소속감과 세 보이는 느낌에 이끌렸을 것이다. 악의로 시작한 게 아니라 소속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을 정치적 현상으로만 듣지 않는다. 그 말들을 오래 반복해서 써온 사람들의 내면이 어떤 모양이 됐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말들이 지금 한국 슬롯의 언어 지형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언어가 먼저 죽는다


민주주의가 죽기 전에, 언어가 먼저 죽는다.


잠실 투표소 앞에서 혐오와 폭력으로 물든 시위를 하며 '4.19 혁명'을 외치는 사람들. 이들이 4.19 혁명이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시민들의 피로 쓰인 역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을 가져다 쓴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 나는 오래된 기시감을 느꼈다.


태극기를 생각해보자.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태극기 집회'라는 말이 굳어졌다. 그 이후 태극기는 특정 정치 집단의 상징으로 코딩됐다. 지금은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꺼내 드는 일이 왠지 꺼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5.18 광장에서, 6월 항쟁의 거리에서 펄럭이던 바로 그 깃발이 이렇게 되는 데까지 10년이 걸렸다.


'페미니즘'을 생각해보자.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언어가 한국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방어가 필요한 단어가 됐다. 여성 권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제가 말하는 페미니즘은..."이라는 주석을 달아야 하는 슬롯. 그 주석이 필요해지는 순간, 이미 그 언어는 오염된 것이다.


이것은 전략이다. 그것도 오래되고 정교한 전략이다. 목표는 그 언어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 자체를 오염시키는 것이다. 4.19, 민주화, 열사. 이런 단어들을 꺼낼 때마다 자동으로 잡음이 붙게 만드는 것. 그 잡음이 쌓이면 단어의 무게가 빠진다. 쓰는 사람이 먼저 해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목적이다.


처음엔 사람들이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과 진저리가 오히려 그 전략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기억에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 각인이 반복되면 연결고리가 생기고, 연결고리가 생기면 오염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일베의 언어가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고 뉴스에서 진지한 뉴스로 보도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지금 주류 보수 정치권이 일베 언어와 문법을 얼마나 흡수했는지를 보면 그 궤적이 보인다.






오염이 완성될 때


그 오염이 완성 단계에 가까워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이번 지방선거, [경향신문] 단독 보도가 나왔다. 선관위가 KBS 자회사 KBS N에 외주를 줘 제작한 선거 홍보영상에 '홍어' 이미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홍어는 일베에서 호남 지역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표현이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AI 프롬프트에는 사람이 직접 "입으로는 반투명한 가오리 모양의 영혼이 빠져나가고 있다"라고 타이핑한 것이 드러났다.


제작사는 특정 지역을 비하하거나 조롱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 해명이 더 무섭다. 프롬프트는 사람이 직접 타이핑하는 것이다. 의도 없이 그 문장을 쓴 사람이 있다면, (물론 그랬을 리도 없지만) 그는 이미 그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한 사람이다. 알고 쓴 것과 자신도 모르게 체화해서 쓴 것, 둘 다 문제이지만 후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심각하다.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공식 선거 홍보물에서, 악의 없이 혐오 표현이 재생산됐다는 것. 현재 한국 슬롯의 오염이 그 지경까지 스며들었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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