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에 넘치는 시민을 가진 나라

우리가 세 번이나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었던 이유

by조하나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슬롯 생활을 하다 결국 한국 슬롯의 답답한 공기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떠났다. 그렇게 한국 밖에서 이방인으로 떠돈 10년의 시간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희미해진 정체성을 붙잡아 일으키고 보호해 준 든든한 방패는 다름 아닌 '한국'이라는 이름이었다. 밖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 나라를 응시하고 나서야,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라는 존재를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그 짧은 시간 안에 경제와 문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최고 수준의 시민 의식까지 모두 이룩한 이 압도적인 국가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찬양하며 연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기에 외부인의 낭만적인 렌즈로만 조국을 바라볼 수 없다. 동시에, 한국 슬롯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 없이 마치 철저한 외부인처럼 공동체의 문제점을 차갑게 지적하고 재단할 수도 없다. 세계가 열광하는 화려한 성취 이면에 자리한 아련함과 조국의 가련함, 그 굽이치는 능선마다 맺혀 있는 피눈물 나는 희로애락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는 까닭이다.


오랜 방황과 방랑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지금 내 조국을 향한 뒤늦은 반성문을 쓴다. 오만한 권력을 맨몸으로 엎어버리며 기어이 시대의 물줄기를 바꿔낸 위대한 시민들에 대한 나의 기록은 항상 여기서 출발한다.




17세 김주열, 소년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흔히 대한민국이 2016 촛불혁명으로 한 번, 2024 12.3 내란에 대한 빛의 혁명으로 또 한 번, 이렇게 총 두 번 대통령을 끌어내렸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두 번이 아니다. 세 번이다. 국회의 탄핵소추나 헌법재판소의 제도적 결정조차 없이, 오직 광장의 시민들의 거대한 저항만으로 자진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한 독재자 이승만까지 더하면 명백히 세 번이다. 시민의 힘으로 오만한 권력의 정점을 끌어내린 쟁취의 역사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17세 소년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같은 해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실종된 지 27일 만에 시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랜 시간 바다에 잠겨 있었음에도 시신은 멀리 해류에 휩쓸려 가지도 않았고 심하게 부패하지도 않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소년은 주먹을 꼭 쥔 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경찰이 정조준하여 쏜 최루탄이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부패한 국가 권력이 무고한 소년의 생명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증명하는 한 장의 사진이 도화선이 되어 4.19 혁명의 거대한 불길이 전국으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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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이 걸어오고 살아오고 피를 흘리며 만들어 낸 길, 지금 내가 한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길로 이어진 그 길을 돌아보면 경이롭다.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깨닫는 배움과 인류애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또한,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이승만 독재 정권이 마침내 무너지고 치러진 장례식 이후, 김주열 열사의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증이 도착했다. 거대한 역사의 변곡점 이면에는 늘 이렇게 가슴을 찢는 개인의 참담한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1960년 당시 시민들이 겪어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깊은 경외감마저 든다. 가혹했던 일제강점기의 수탈, 잿더미로 변해버린 참혹한 한국전쟁, 그리고 12년에 걸친 이승만의 철권통치가 그들이 세상에 태어나 경험한 국가의 전부였다. 그런데 주권자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아본 적 없는, 민주주의가 어떤 건지 단 한 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민들이 스스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직선제'와 '민주화'를 외친 것이다. 자국민에게 총부리를 너무나도 많이 겨눈 폭력적인 이 나라는, 참으로 분에 넘치는 시민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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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볼모로 이용한 권력



해방 직후, 3년 간의 미군정 통치가 끝난 후, 대한민국 시민들은 오래도록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해 온 백범 김구 선생을 지도자로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김구를 원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의 최우선 과제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 동북아시아에 확고한 반공 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끝까지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고집했다.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과 패권 전략에 복무해야 했던 미군정에게 그는 통제를 벗어나는 매우 껄끄럽고 비협조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미국은 노골적으로 김구 선생을 주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했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기 쉬운 이승만을 전면에 내세우며 독립투사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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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폭력으로 시민의 피를 딛고 선 이승만 독재 정권의 배후에는 강대국의 냉전 논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게 1950년대의 한반도는 민주주의가 꽃피어야 할 토양이라기보다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반공의 방파제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훨씬 중요했다. 이승만은 강대국의 조급함을 아주 영악하게 이용했다. 동북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으려면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미국을 상대로 벼랑 끝 생존술을 펼쳤다.



물론 미국이 이승만의 폭주를 무조건 묵인하고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1952년 이승만이 군인들을 동원해 국회의원을 감금하고 강제로 헌법을 뜯어고친 발췌개헌, 곧 대한민국 헌정사 첫 친위 쿠데타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미국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어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의 억지스러운 불법성을 마주했을 때도 미국 내 의사결정자들은 깊은 우려를 표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심도 있게 검토되었지만, 전쟁과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를 대체할 만한 강력한 리더십을 찾지 못했고 결국 개입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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