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이라는 환상, 그 중심을 지우다

훈수 두는 서양을 앞질러 간 한국의 진짜 목소리

by조하나





스스로 지은 이름, 백인(White People)



최근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서구 슬롯 일각에서는 한국인이 밝은 피부를 선호하는 문화를 두고 "백인을 동경하기 때문이라는 비판"을 가하며 조롱하고 비웃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의 기저에는 5천년 역사를 가진 한 국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무지와 자민족 중심주의가 빚어낸 오만한 착각이 깔려 있다.



한국 역사에서 맑고 투명한 피부에 대한 선호는 서양인과의 접촉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다.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백옥 같은 피부'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배 계급의 특권과 깨끗함을 상징했다. 실제로 5세기 후반에 그려진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를 보면 귀족 여성의 얼굴이 시녀들에 비해 확연히 하얗게 묘사되어 계급적 차이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또한, 19세기 초 조선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 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에는 꿀과 인삼, 분꽃 씨앗 등을 활용해 맑고 하얀 피부를 가꾸는 전통 미백 화장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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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밝은 피부는 오랜 시간 축적된 독자적인 미적 기준이자 청결함의 지표였을 뿐, 특정 인종의 외모를 모방하려는 욕망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과거 조선에서는 서양인을 강한 햇볕에 노출되면 쉽게 붉어지는 특성을 담아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을 가진 '홍모인(紅毛人)'이라 불렀다.



이러한 주체적 시선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16세기 전국 시대 일본에 백인들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일본인들은 움푹 파인 눈과 거대한 매부리코를 가진 그들을 우러러보는 대신 자신들의 전통 설화 속 요괴인 '텐구(天狗)'나 붉은 얼굴의 '오니(鬼)' 이미지에 투영하여 기묘한 구경거리로 소비했다. 중국 명·청 시대 문헌 역시 백인을 '홍모번(紅毛番)'이라 칭하며 푸른 눈을 짐승이나 고양이의 눈에 빗대어 기록했다.



아시아의 역사적 시선 속에서 서양인은 경계와 관찰 대상인 낯선 타자였을 뿐, 결코 미적·문화적 동경의 디폴트 값이 아니었다. 백인이 하얗다며 스스로 '화이트(White)'라는 언어적 규정을 만들어낸 건 결국 권력을 쥔 그들 자신이지, 이 세상의 백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백인을 '화이트'라 부른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토록 주체적인 시선으로 서양인에 대한 관찰 기록을 남기던 시기에, 오늘날 세계의 기준값을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국가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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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맥락 슬롯의 일방적 오해와 오만한 판단



밝은 피부에 대한 선호는 언어적 뉘앙스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한국어와 같은 고맥락 언어에서 '하얗다'는 표현은 일차적인 색상 값을 넘어 피부가 투명하고 생기 있으며, 잡티 없이 매끄럽고 탄력 있다는 상태의 총합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예쁘다'는 말 역시 상황에 따라 귀엽다, 사랑스럽다, 심지어는 자랑스럽거나 멋지다는 감정적 스펙트럼까지 포괄한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구사하는 미적 척도의 언어적 층위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오해는 더욱 투명해진다. 한국인들은 누군가의 외모를 평가할 때 "서구적으로 아름답네"와 고유한 의미의 "아름답다"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짙은 쌍꺼풀이나 입체적인 골격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사람에게는 단지 서구적인 특징을 묘사하는 수식어로서 "서구적으로 생겼다" 혹은 "서구적으로 아름답다"라고 표현할 뿐이다. 반면 한국인이 진심으로 찬탄하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전체적인 선의 조화, 맑고 단아한 분위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품에 닿아 있다. 즉, 서구적인 이목구비는 여러 외형적 스타일 중 하나일 뿐, 결코 한국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미의 절대적 기준값이 아니란 뜻이다. 이러한 풍부한 맥락을 무시한 채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하여 이를 인종적 선망과 연결 짓는 것은, 타 문화의 언어적 깊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게으름의 소치다.



백인(White People)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해야 한다. 인종적 구분은 생물학적 분류를 넘어 문화, 역사, 지리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물이다. 정작 하얗지도 않은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화이트'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배타적 소유물인 양 휘두르며 타 인종을 조롱하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언어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며, 자신들이 정한 기준이 세계의 보편적 정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학술적인 연구 결과 역시 이러한 주체성을 뒷받침한다. 인류학 및 유전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동아시아인의 밝은 피부는 서구인과는 완전히 다른 유전적 경로를 통해 진화했다. 유럽인이 SLC24A5라는 유전자 변이를 통해 피부가 밝아졌다면,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은 OCA2나 HERC2 같은 독자적인 유전자 변이를 통해 밝은 피부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한국인의 밝은 피부는 누군가를 흉내 낸 결과가 아니라 북반구 고위도 환경에 적응하며 수만 년 전부터 우리 DNA에 새겨진 고유한 정체성이다. 과학적 팩트조차 무시한 채 모든 현상을 '백인 선망'이라는 낡은 프레임에 가두려는 그들의 시도는, 자신들이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있는지 스스로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오만하고 게으른 시선은 "한국은 성형 왕국이며, 한국인들은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특별한 미백 시술을 받고 얼굴을 뜯어고친다"는 왜곡된 가십 소비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당장 나를 비롯해 내 주변만 둘러보아도 특별한 미백 시술이나 성형수술을 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외모 트렌드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패션지 잡지 에디터로 오랜 시간 일할 때조차, 무리하게 얼굴에 칼을 대는 동료는 거의 없었다. 서구권이나 동남아, 중동 미디어가 서울에 즐비한 성형외과 간판을 비추며 조롱하지만, 정작 그 수많은 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환자들이 누구인지 통계 데이터를 보면 실체적 진실이 드러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최신 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 수는 사상 처음으로 연간 2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들이 한국에서 지출한 의료관광 총액만 12조 5,000억 원에 달하며, 전체 진료의 약 74%가 피부과와 성형외과에 집중되었다. 즉, 그들이 비꼬는 '성형 왕국'의 거대한 인프라는 한국인들의 외모 강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K-뷰티를 동경하여 미국, 동남아, 중동, 중국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백만 명의 외국인 환자들이 지탱하고 있는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이다. 정작 자신들이 비행기 표를 끊고 날아와 병원 로비와 침대를 가득 채우고 있으면서, 그 바카라임을 한국인의 백인 선망으로 둔갑시켜 훈계하는 행태는 거대한 위선이자 코미디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성진 감독의 <성난 사람들> 시즌 2가 한국인 억만장자 부부 앞에서 얄팍한 밑천을 드러내는 백인 상류층의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했듯, 자신들의 결핍은 가린 채 타국을 훈계하려 드는 그들의 오만함은 이제 글로벌 대중문화 속에서도 통쾌한 조롱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이 한국인의 피부색을 논하는 기저에는 인종 간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비겁한 의도가 숨어 있다. 동아시아인의 피부는 유전적으로 밝게 타고날 뿐만 아니라, 햇볕에 그을리더라도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강력한 가역성을 지닌다. 이것은 인위적인 ‘미백’이 아니라 유전적 기본값으로 회귀하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러한 생물학적 팩트를 무시한 채, 한국인의 모든 밝은 피부를 ‘백인 선망’이라는 조롱 섞인 단어로 뭉뚱그려 비하한다.



이러한 왜곡은 아시아인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게으르게 일반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들은 지리적으로나 유전적으로 명백히 다른 동남아시아인의 피부색을 '아시아인의 표준'으로 제멋대로 규정한다. 그러고는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한국인의 피부색을 백인을 흉내 낸 결과물이라며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세운다. 심지어 같은 아시아권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이 지닌 피부색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을 한국인에게 투사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본래 피부색을 부정하고 '백인 선망'이라는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자신들의 심리적 결핍을 보상받으려 드는 것이다.



백인이나 흑인에 대해서는 그토록 세밀한 인종적 규정과 감수성을 요구하면서도, 전 세계에서 가장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색만을 강요하는 태도는 명백한 폭력이다. 한국인이 밝은 피부를 선호하는 문화적 기호를 두고 인종차별이라 손가락질하는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사실 한국인의 생물학적 정체성과 고유한 문화를 말살하려는 가장 악의적인 인종차별이다.



아시아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갈등은 과거 제국주의 식민 지배 세력이 남겨둔 정교한 인종적 서열화의 유산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실체적인 증거다. 과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피지배층이 연대하여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족 간에 자의적인 위계를 설정하고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한국인의 선천적인 밝은 피부를 '백인 선망'이라 공격하고, 반대로 동아시아인이 어두운 피부색을 근거로 동남아시아인을 차별하는 풍경은 백인이 설계한 인종적 서열 도표 안에서 누가 더 높은 칸을 차지할 것인지 다투는 비극적인 대리전과 같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논쟁은 우리를 바라보는 서구의 '백인적 시선(White Gaze)'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동남아시아인들이 한국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부정하며 백인 선망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는, 자신들의 내면에 깊게 뿌리 박힌 식민지 트라우마와 열등감을 엉뚱한 곳에 투사하는 자기 파괴적 행동이다. 또한 동아시아인이 피부색을 근거로 같은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것 역시, 결국 스스로를 백인들이 만든 인종 피라미드의 하위 범주로 귀속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기보다 이 모든 위계와 정의를 독점해 온 서구의 오만한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고 연대해야 한다. 아시아의 다양한 피부색과 문화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고유 가치이지,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평가받아야 할 등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해외에서 유럽인과 북미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다이빙을 가르쳤다. 열대의 바다에서 조금만 햇빛을 쬐어도 피부가 금세 새빨갛게 익어버리는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조상들이 문헌에 남긴 '홍인'이나 '홍모인'이라는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 팩트였는지 실감했다. 도대체 왜 스스로를 '백인'이라 이름 붙였는지 물리적인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결국 경제적 지배력은 언어적 규정과 문화적 권력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이 모든 권력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아떨어져야만 사람들의 정신과 고정관념을 지배하며 자의적인 인종의 계층화를 공고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다이빙을 가르치며 몸담았던 해외의 대형 센터에서, 우리 팀원 중 백인이 아닌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오랜 슬롯생활을 거친 뒤 마주한 그 이질적인 환경은 초기에 적응하기 벅찬 도전이었다.



현장에서 겪은 대다수의 서양 백인들은 과도할 만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은 내 기준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심하게 부풀려, 자신감의 경계를 탈선한 오만한 자만심으로 비칠 정도였다. 그들이 밤새 파티를 즐기느라 다음 날 스케줄을 무바카라임하게 펑크 낼 때마다, 그 빈자리를 묵묵히 메운 것은 주로 내 몫이었다.



그들은 대개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나에게 다이빙 로그 수를 물어오곤 했다. 그러고는 "오, 내 다이빙 로그 수(다이빙 경험 횟수)는 200이야!"라며 자신이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뛰어난 다이버라는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과시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당시 내 다이빙 로그 수가 이미 1,000회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그것이 내가 나고 자란 공동체에서 배운 '겸손'의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다이버'란 단편적인 숫자 하나로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은 내가 너무 '샤이'하다거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고 단정지었다. 얄팍한 수치로 우위를 점하려는 그들과, 내면의 깊이를 응시하는 나의 시선 사이에는 결코 메워지지 않는 거대한 문화적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만한 시각에서 시작한 인종차별은 결국 인종차별로 이어지곤 했다.



모르는 척 하지 말자. 인정할 건 인정하자. 백인 우월주의와 타 인종을 향한 차별은 이 세상에 분명하게 실재한다. 단지 가해자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피해자들이 괜찮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뿐이다. 서구 중심의 시스템과 교육에 노출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인종의 위계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한 채 살아간다. 오해하지 말라. 내가 인종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바로 이 견고한 시스템 자체에 균열을 내고 고치기 위함이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무지한 이들을 상대로 억울함이나 분노를 쏟아내며 헛되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일본, 중국의 역사적 문헌의 유럽인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볼 수 있듯 "선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바뀌는 법"이다. 지금까지 서양인들은 오직 자신이 선 곳의 풍경만을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상은 보다 더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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