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밖의 하루, 그럴 수도 있지
여행을 앞두면 엑셀부터 열었다. 가고 싶은 곳과 이동 시간을 적고, 비가 오거나 문을 닫았을 때를 대비해 플랜 B도 만들어 두었다. 계획을 세우는 일을 좋아했지만, 막상 일정이 틀어지면 마음이 상했다. 준비한 하루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그런 나에게 제주 생활은 참 난감할 때가 많았다. 분명 예보에서 맑은 날씨를 보고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렸고, 비 온 뒤 개인 하늘을 믿고 움직이면 바람이 거세졌다. 어느 때는 시커먼 구름이 꼭 내 머리 위로만 따라오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핸드폰 날씨 앱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과 송악산 둘레길을 걸으려던 날에는 비가 내려 제주추사관으로 방향을 바꿨다. 반대로 날이 좋아지면 하던 일을 조금 미뤄두고 초코와 한담해안산바카라로로 나갔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가볍게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서울에 급히 다녀와야 했던 날에는 강풍 때문에 비행기가 몇 시간이나 지연됐다. 늦은 밤에야 탑승했고, 자정이 지나 김포공항 대신 인천공항에 내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네 시 가까이 됐다. 제주의 날씨는 때로는 호되고, 그만큼 고되다.
지난 2월, 큰맘 먹고 제주 동쪽 끝으로 떠난 날도 그랬다. 오랜만에 여행 기분을 내려고 신상 숙소를 예약하고 주변 둘러볼 코스까지 골라두었는데, 칼바람에 이어 강풍주의보와 대설경보가 떴다. 가려던 곳들은 폭설로 아예 길이 통제되어 포기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빙판이 된 도로를 조심조심 운전하느라 만만치 않았다. 그저 집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꼼짝없이 숙소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 덕분에 통창 너머로 보이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하늘과 눈발이 휘몰아치는 풍경마저도 고요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세찬 바람에 실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주 단순한 움직임을 멍하니 보다 보니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는 걸 오고 가는 인연과 세월 속에서, 이 바람 부는 날처럼 그 흐름을 거스를 순 없음을 말이다.
물론 제주는 그렇게 쉽게 날 놓아주지는 않았다. 마침 결혼 20주년과 딸의 고등학교 졸업을 기념해 제주를 떠나기 전 야외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5월의 초록빛 오름과 저녁노을을 기대하며, 몇 달 전에 예약을 해두었다. 그런데 촬영일이 가까워질수록 그 날씨 좋은 5월 하필 그날에만 비 예보가 떠 있다.
문득 20여 년 전 결혼식 날이 떠올랐다. 아침에 메이크업을 받을 때만 해도 흐리기만 하던 하늘에서, 식장으로 가는 길에 비가 퍼부었다. 천둥번개까지 쳤다.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을 위로 삼아 들었지만, 솔직히 그날만큼은 맑았으면 했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에도 메이크업을 마칠 때까지는 햇빛이 보였다. 밖으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다. 취소하기도 어려워 비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숲길로 갔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에 서둘러 찍고, 다시 비가 거세지자 촬영을 접었다. 곱게 해 놓은 화장은 지워지고 머리도 내려앉았다. 휴대폰으로 제주 전역 중 그나마 비가 적게 오는 곳을 찾아 움직이고, 비를 맞으며 장비를 챙기는 사진작가님들을 보니 아쉬움의 소리는 할 수도 없었다.
그날 바라던 풍경을 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지 하던 우리 가족이 꽤나 긍정적이구나를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우리 셋은 제주를 떠나기 전 하루를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계획을 세우고, 중요한 날에는 맑은 하늘을 바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일정이 어긋났을 때 그 하루를 실패한 계획으로만 보지는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쉬워할 것은 그것으로 내려두고, 돌아갈 길을 살피거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너무 얽매여 나를 소모하지 말자는 것이다.
제주에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이 조금씩 편해진 것은 날씨를 좋아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달라진 상황에서도 내 하루를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해는 뜨고 하늘은 맑아진다는 것. 중요한 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순응하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일 것이다.
고요미학의 자리를 생각할 때도 그런 제주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바깥의 날씨나 누군가의 하루를 내 뜻대로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차를 마시며 잠시 머물 자리는 마련할 수 있다. 계획을 다시 세우기 전에 앉아 있었던 제주의 창가처럼, 각자의 속도로 다음 시간을 맞을 수 있는 자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