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고 싶은 길, 오래 바라본 바다
비가 그친 뒤에 서귀포 치유의 숲을 찾았다. 엄부랑숲길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나무 사이로 옅은 안개가 걸려 있었고, 발을 옮길 때마다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숲의 촉촉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길을 따라 걷다 멈춰 서서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운 잎은 또렷하고, 그 뒤의 나무들은 흐릿하게 가려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니 차가운 공기가 머리까지 맑아지게 한다. 코끝에 스미는 강력한 흙내음과 피톤치드의 향기, 짙은 녹색의 그라데이션, 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 살짝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까지 모든 감각과 일체감을 얻게 된 진정 나만의 시간을 마주한 경험이었다.
송악산 둘레길은 산과 바다를 모두 품은 길이다. 우리나라 제일 남쪽, 한쪽으로는 깊고 푸른 바다와 깎여진 절벽의 장관이, 고개를 돌리면 송악산이 보였다. 구불구불 펼쳐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혼자 걸어도 좋고, 여럿이서 함께 걸어도 좋다. 같은 길을 걸어도 그날의 동행과 날씨에 따라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달랐다.
바다 앞에 서서 오래 머물고 싶을 때는 금능해수욕장으로 갔다.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변을 고르라면 나는 금능을 말할 것 같다. 흰모래가 비치는 얕은 곳의 물빛은 연한 녹색에 가깝고, 조금 멀어지면 파랑이 짙어졌다.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은 언제 봐도 평온함을 전해준다. 어반스케치를 배우며 그 물빛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막상 바다 앞에서는 어느 색부터 골라야 할지 한참 바라보게 됐다. 여러 번 찾았어도 금능의 바다는 매번 조금씩 달라 보였다.
봄에 사계리 쪽을 지나다 산방산 앞에서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산방산은 구름에 가려 있었고, 그 아래 청보리밭이 바람을 따라 일렁였다. 마치 푸른 손짓을 하듯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청명한 가을날엔 산굼부리의 억새를 보러 갔다. 햇살을 받은 억새가 은빛으로 반짝였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넓은 들판의 결이 바뀌었다. 제주의 봄과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풍경들이었다.
노을이 예쁠 것 같은 날에는 싱계물공원으로 향했다. 싱계물은 '새로 발견한 갯물'이라는 뜻이다. 바닷가 검은 돌과 잔잔한 파도 위로 해 질 무렵의 빛이 내려앉았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조금 전까지 보이던 색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딸아이와 초코가 앞서 가는 뒷모습도 사랑스럽다. 함께 제주에서 지낸 시간은 늘 이렇게 한 장면으로 남는 것 같다.
모든 것은 변하고,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마치 각자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냈을 이들을 포용하며, 다시 살아갈 빛으로 붉게 물들이는 것 같다. 낙조에 물든 바다의 색은 자체로 오묘하고 신비롭다. 매 순간 다른 예술작품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자연의 힘을 오롯이 마주한다. 점점 수평선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듯 저무는 해를 보니 은은하게 마음의 평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