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우리며 보내는 시간

제주의 찻자리에서 알아간 마음과 취향

by박현정

가을비가 내리던 날, 딸과 <회수다옥>에 갔다. 서귀포 자연휴양림 근처, 한라산 중산간으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찻집이었다. 제주의 자연과 정성을 담은 티 맡김 차림을 예약했다.


차를 내어주는 동안 제주의 자연과 차를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차마다 다기가 달랐고, 곁들이는 음식도 정갈했다. 단순히 먹는다는 행위를 넘어 차를 우리고, 마시며 음미하는 과정 자체가 오감을 깨우는 동시에 나에게 주는 매우 귀한 시간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제주의 물과 바람이 키우고,제주 농부가 정성으로 거둔 차와 티푸드를 맛볼 수 있는 회수다옥


그날은 딸과 공부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지금 마시는 차가 어떤지, 어떤 맛이 마음에 드는지 이야기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뒤에도 대화가 학교와 과제, 앞으로의 일정으로 흐르는 일이 많았는데, 그날 우리 앞에는 다른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딸은 제주 녹차의 맛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후로 평소 집에서도 녹차를 자주 마셨다. 입시를 준비하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차를 먼저 준비했다. 일단 차를 우릴 때부터 서로의 긴장되고 퍽퍽해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다듬어 주었다.


제주에 살며 카페와 함께 찻집을 찾아가는 일이 늘었다. 처음에는 공간이 궁금해서 가기도 했고, 새로운 맛을 보고 싶어 예약하기도 했다. 커피와는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고, 마시고 나서 남는 인상도 저마다 달랐다.


한라수목원 근처 <우연못>에서 마신 월광백차는 싱그러웠고, 육보차에서는 비 온 뒤 숲의 냄새가 느껴졌다. 곶자왈을 걸을 때 맡았던 흙과 나무의 냄새가 떠올랐다. 낯선 차였지만 향기에는 아는 구석이 있었다. 워낙 향기를 좋아하고 오래 아로마테라피를 공부해 온 내게 차는 궁금한 것이 많은 음료였다. 잔에 코를 가까이 대고 맡을 때와 한 모금 마신 뒤에 느껴지는 것이 달랐다. 어떤 향기는 익숙한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설명을 듣고 다시 마셔보면 처음에는 모르던 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찻잔을 문향배라 하며 그것이 ‘향을 듣는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향을 맡으며 무언가를 알아맞히려 하기보다 가만히 기다려 보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근사한 표현이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티하우스 우연못


사실 제주에서의 생활이 늘 차분했던 것은 아니다. 딸의 입시가 가까워질수록 아직 나오지 않은 결과를 두고 간절했던 만큼 염려가 크기도 했고, 앞으로의 내 생활도 고민이 많았다.


요가와 명상을 꾸준히 해오던 ‘숨쉬는고래’에서 한 달의 수련 주제로 ‘붙잡지 않음’을 다룬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감정과 관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주는 일이 필요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찻자리를 찾아다닌 건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차를 내어주는 분의 설명을 듣고, 따라준 차를 마시고, 다음 잔을 기다렸다. 그 순서를 따라가는 동안에는 생각을 억지로 정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됐다. 그저 정성껏 지금을 사는 삶에 충실했다.


매일 오가던 '오설록 티하우스'와, 조천의 '올티스' 다원에서는 직접 차나무들을 보고 티클래스를 들을 수 있어 특별했다. 차의 종류와 우리는 방법, 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알고 마시는 즐거움이 늘어났고, 더 배워보고 싶어졌다.

Organic tea house 를 줄인 말로 유기농으로 엄격하게 재배하며 관리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올티스 다원


티하우스 '호월'에서는 큰 테이블 사이에 보름달이 뜬 것 같은 조명이 참 인상적이었다. 빙도 청병, 노총 홍수 우롱 등을 차례로 마셨다. 빙도 청병에서는 은은한 꽃향기와 단맛을 느꼈고, 마지막 우롱차에서는 견과류 같은 고소함과 뒤에 남는 단맛이 느껴졌다. 점점 차를 느끼는 미각이 섬세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마셨을 때 바로 감탄이 나오는 차들은 남는 여운도 길게 이어진다.

여백사이로 자연스레 단정한 여백을 만날 수 있는 티하우스 호월


계절에 따라 기다리는 차도 생겼다.

입시를 마친 딸과 함께 우연못의 봄 계절 차회에 함께 갔다. 햇우전 녹차의 여린 연둣빛을 보고, 향기를 맡고, 가볍게 마셨다. 연두부와 녹찻잎 튀김이 함께 나왔다. 이어진 홍차에서는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졌다. 방풍나물주먹밥과 흰 생선을 곁들인 오차즈케를 먹으며 봄나물의 향기도 맛봤다. 같은 봄을 찻잎과 음식으로 다르게 느껴보는 자리였다. 제주에서는 꽃이 피고 바람이 달라지는 것으로 계절을 알아갔는데, 이제는 찻자리에서도 그 변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날 마지막에 마신 차는 ‘나이트 오브 곶자왈’이었다. 이전에 딸과 방문했다가 집에서 마실 차를 골라 보라고 했을 때 아이가 선택한 차였다. 우리 집에서도 마시던 차가 코스의 끝에 나오니 반가웠다. 새로운 맛을 알아가는 설렘 곁에 익숙한 차를 다시 만나는 즐거움도 생겼다.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섬세하게 고르고 기억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차에서 숲 냄새를 맡았는지, 어떤 잔의 단맛이 오래 남았는지, 딸은 무엇을 골랐는지. 다시 마시고 싶은 이유가 하나씩 생겼다.


이 모든 찻자리를 처음부터 나를 돌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맛이 궁금했고, 공간이 좋았고, 누군가 정성껏 내어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즐거웠다. 그 순간만큼은 삶의 틈새로 들어온 따스한 온기가 두 손안에 스며들었다.


딸의 유학을 앞두고 작은 다기 세트를 선물했다. 고양이와 꽃, 네잎클로버가 그려진 다기였다. 멀리서 혼자 지내다 따뜻한 차가 생각날 때 꺼내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고양이와 소담스러운 꽃, 네잎클로버를 볼때마다 기분좋은 순간을 전해줄 것 같은 다기들


처음 제주로 내려갈 때는 곁에서 밥을 차려주고 일상을 챙겨주고 싶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는 차를 마시러 다녔고, 좋아하는 맛을 이야기했고, 집에서 마실 차를 골랐다.


다기 세트를 고르며 그런 날들이 생각났다. 이제 내가 곁에 없는 곳에서도 딸이 자신에게 차 한 잔을 내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전 03화머물며 알게 된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