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스한 흙의 온기를 간직한 은총의 땅
경기도 하남 미사신도시. 옛 기억과 다정한 이야기가 흐르던 흙길은 흔적도 없이 파헤쳐 사라지고 영혼없이 메마른 거대한 아파트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숨막히는 도시 개발속에서 거짓말처럼 흙의 온기를 머금은 나지막한 숲이 있습니다.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곳, 바로 구산성지입니다.
마치 신도시의 차가운 아파트단지와 성스러운 은총의 땅을 구분하려는 듯 거북의 등을 닮은 거칠고 높은 경계로 담을 세운 구산성지는 세상의 욕심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이 굳건히 세워져있었습니다. 콘크리트의 장벽이 턱밑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그 경계 너머에는, 거짓말처럼 흙의 온기를 머금은 나지막한 숲이 평화를 간직한 채 순례자를 반겨줍니다.
거북이등 모양이자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한 납작한 기와 대문인 은총문을 들어서자 마자 순례자에게 전해지는 이 아름다운 평화는 200여년 전 목숨을 바쳐 신앙을 고백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사랑과 평화의 온기입니다. “살아도 천주교인,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요” 라고 고백하며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파리외방 전교회의 모방신부님께서 공소를 설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교회의 기틀을 다지신 분입니다. 또한 성인은 박해의 서슬 퍼런 칼날 속에서도 교우촌의 신자들을 가족처럼 돌보며 살았습니다. 넉넉한 양반이었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집을 기꺼이 내어놓아 교우촌을 일구었고, 이웃들과 머슴까지도 모두 한 식구처럼 돌보았다고 합니다. 현재 구산성지에는 성인의 진묘와 함께 순교하였던 동생들과 아들 그리고 머슴 등 교우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의 진묘가 보존되어 그분들의 신앙을 기리고 있습니다.
묘역 뒤편 잔디광장에는 마치 하늘을 향해 뻗은 솟대처럼 보이는 아주 높다란 10개의 순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탑의 끝자락에는 순교자 9위 한 분 한 분의 거룩한 신앙을 형상화한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개의 십자가는 이곳을 방문하여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 ‘나’자신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순례자는 푸른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십자가를 올려다 보며 순교한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묵상합니다. 그 신앙 선조들의 신앙앞에서 순례자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속으로 파견될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2삶이 곧 기도였던 자리
구산성지는 은총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성지의 곳곳에 순례자를 기도의 길로 인도하게 만드는 거룩하고 숭고한 묵상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운총문을 지나면 순례자를 처음 맞아주는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을 만나게됩니다. 왕관을 쓰시고 오른 손에는 왕홀을 든 마리아상은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성모님이시기도 합니다. 이 성모상은 구산성지의 초대 주임신부였던 고 길홍균 이냐시오 신부님의 깊은 성모 신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알현한 성모 마리아의 강렬한 모습을 잊지 못하고 이를 성물로 재현하였다고 합니다, 조각가로서 대가였던 김세중 프란치스코 화백에게 의뢰하여 제작하였고 화백은 신심을 다해 작업하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화백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으며 1983년에 공식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성모님께 기도를 마친 순례자가 성지 안쪽으로 난 길로 발길을 돌리면 구산성지만의 순교 영성이 고스란히 담긴 독특한 묵주기도의 길이 시작됩니다. 거칠고 투박한 옹기 항아리 위에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뜻하는 하얗고 푸른 도자기 묵주알들이 정성스레 얹혀 있습니다. 이 항아리들은 박해 시절 신앙 선조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메고 다녔던 새우젓 항아리입니다. 서슬퍼런 감시를 피해 산속에 숨어 옹기를 굽고, 새우젓 장사로 고단한 삶을 연명하면서도 옹기속에 서적과 성물을 숨겨 전교하였고 그러면서도 결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조들의 삶, 아름답게 반짝이는 도자기 묵주알을 만지며, 순례자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결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조들에게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과 그 고단했던 삶 자체가 곧 하나의 기록한 기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성지묘역 뒤편에는 독특한 무늬의 창문이 나 있는 성지성당이 보입니다. 이 성지성당은 16개의 독특한 나무창문이 나 있습니다. 모진 박해의 현장에서 신앙 선조들이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포승줄이나 창살, 곤장 등 신앙선조들이 겼었던 끔찍한 고문 도구들을 형상화한 ‘형구의 창’입니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했던 그 신앙 선조들의 기도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치 않고 하느님을 찬양했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그들의 삶이야 말로 진정한 기도였다는 것을 순례자는 마음깊이 새기며 세상 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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