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순교성지

by지드

1. 비극의 땅에 세운 순교성지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남한산성의 울창한 숲 위에 머물지만,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는 미쳐 닿지를 못합니다. 두터운 숲이 만들어주는 깊은 그늘 덕분에 산길은 오히려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사합니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늘 등산객과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남한산성이 품은 붉은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 이곳을 찾습니다. 수려한 풍경 너머, 오직 순교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거했던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마주하며 마음 깊이 되새겨 봅니다.


이곳을 처음 찾는 순례자들은 ‘왜 이 높고 푸른 산성 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당시 남산산성은 백성들의 휴식처가 아닌, 경기 남부 일대의 군사와 사법을 호령하던 ‘광주 유수부’가 있던 서슬 퍼런 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조정의 눈을 피해 갚은 산속 교우촌에 숨어 살던 신자들은 박해때마다 그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하고 붙잡혀 이 가파른 산길을 따라 압송되었습니다. 당시 박해를 피해 전국으로 흩어져있던 신자들은 법에 따라 자신의 출생지인 이곳으로 압송되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을 오르면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던 두터운 숲 그늘은, 어쩌면 당시 피를 흘렸던 선조들의 고통소리를 묵묵히 덮어주었던 눈물의 장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슬픔이 자리하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잊혀가던 무명의 치명터를 발굴하기 위한 여러 신부님들의 노력으로 1998년에야 공식적인 성지 선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구에서는 초대 주임 신부이신 김유신 신부님을 파견하여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의 동문앞에는 양철로된 초라한 안내문으로 여기가 신자들의 처형이 있었던 천주교순교성지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2004년 9월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하고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위로하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현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양비가 세워지던 당시만해도 여렵게 매입한 건물 1층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기에 늘어나는 순례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2015년 4월 철근 콘크리트와 전통 한옥을 조화롭게 혼합한 지상 2층 규모의 아름다운 한옥 성당을 완성하여 봉헌하였습니다, 새로운 성당이 들어서면서, 구 성당 건물은 첫 순교자인 한덕운 토마스 복자를 기리는 토마스홀로 리모델링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영적 쉽터가 되었습니다. 잊어져있던 치명순교터가 이제는 역사와 종교, 자연이 함께 숨 쉬는 영성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2.연령을 위한 기도성지(한덕운 토마스복자)


남한산성 성지에는 한분의 복자와 9위의 하느님의 종을 포함한 300여명의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며 그들의 신앙을 기리고 있습니다. 복자로 시복되신 분은 한덕운 토마스입니다. 신유박해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준 자비의 순교자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셨으며 남한산성에서의 첫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충청도 출신의 복자 한덕운 토마스는 그 시대의 다른 신자들처럼 평생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이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의왕으로 이주했습니다. 오직 신부님(주문모 신부)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옹기장수로 위장한 채 삼엄한 감시속에서 한양을 왕래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양 청파동으로 향하던 길에 신자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참혹하게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거적을 들춰본 그의 눈앞에, 평소 알고 지내던 복자 홍낙민 루카의 시신이 나타났습니다. 밀려오는 슬픔 속에서도 그는 정성을 다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해 주었습니다. 비록 이 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오직 굳건한 신앙과 형제애로 길가에 버려진 수많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주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나라를 뒤흔든 중범죄로 취급되어, 배교하지 않으면 처형되던 시기였습니다. 대역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것 또한 동조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으나, 복자 한덕운 토마스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결국 고발로 체포되어 이곳 남한산성으로 압송된 그는 모진 배교 강요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덕운 토마스는 마지막까지도 조금의 두려움이나 흔들림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초연한 태도로 망나니를 향해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달라고 하셨다 합니다. 칼을 든 망나니가 도리어 두려움에 손을 덜덜떨어 세 번만에야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성지 현양비 한켠에는 순교자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동상이 피에타상을 연상시키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동상을 바라보는 순례자들은 복자의 강인한 신앙 영성을 배움과 동시에, 그가 몸소 실천한 행동 속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3. 한 장의 종이로 가둔 숨(백지사형)


성당과 토마스홀을 두고 그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당시 잡혀온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동원된 질식사 형벌인 백지사(白紙死)를 묘사한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 끔찍한 형벌을 받는 모습이 마치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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