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반 고흐 미술관

그의 편지를 따라서

by간서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년

네덜란드 여행 이틀째다. 오전 아홉 시에 반 고흐 미술관, 낮 열두 시에 안네의 집을 볼 예정이라 아침부터 서둘렀다.


반 고흐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다. 유화 이백여 점과 소묘 오백여 점, 그리고 편지 칠백여 통이 여기 있다. 1973년에 문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었다. 살아서 팔린 그림은 거의 없는데 남은 편지는 903통이다. 빈센트가 쓴 것이 820통, 받은 것이 83통이고, 그중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만 650통이 넘는다.


편지에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색을 어떻게 썼는지, 돈이 얼마나 부족한지가 그대로 적혀 있다.


그 편지를 징검다리 삼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따라가 보고 싶었다.


아홉 시 개관에 맞춰 들어가서인지 안은 한산했다.


유리 지붕으로 덮인 넓은 로비 한가운데에 큰 화면이 세워져 있었다. 흰 꽃이 핀 가지가 화면 가득 천천히 움직였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다.




우연히 찍힌 편지


미술관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열아홉 살 때 찍은 그의 사진과, 스물일곱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안내판을 담으려던 것이었다.



돌아와서 사진을 보다가 왼쪽 귀퉁이에 편지 한 통이 같이 들어온 것을 알았다. 그 아래 설명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가장 이른 편지, 1872년.


알았더라면 좀 더 제대로 찍었을 텐데 아쉽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갔는데도 놓쳤다. 그 바카라은 1874년 1월 편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 고흐 미술관의 편지 전집 사이트(vangoghletters.org)에 들어가 보고서야 그보다 앞선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1872년 9월 29일, 헤이그에서 쓴 편지. 빈센트가 열아홉, 테오가 열다섯이던 때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1880년보다 팔 년 앞선 이야기다.


1872년 9월 29일, 헤이그

사랑하는 테오에게

편지 고맙다. 무사히 돌아갔다니 다행이구나. 처음 며칠은 네가 없어 허전했다. 오후에 집에 돌아왔을 때 네가 없는 것이 낯설었다.

우리는 함께 즐거운 며칠을 보냈지. 틈이 날 때마다 정말로 산바카라을 다녔고 이것저것 구경도 했다.


날씨가 어지간히 궂구나. 오이스테르베이크까지 걸어 다니려면 마음이 편치 않겠다. 어제는 박람회를 맞아 경마가 열렸는데, 날이 나빠 조명 행사와 불꽃놀이는 미뤄졌다. 그러니 네가 남아서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다. 하네베이크 댁과 로스 댁에서도 안부를 전한다.

늘 너를 아끼는 빈센트

https://vangoghletters.org/vg/letters/let001/letter.html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다. 날씨와 안부와 동네 행사 이야기뿐이다.


그런데도 두 문장이 눈에 걸린다. 처음 며칠은 네가 없어 허전했다는 말, 오후에 집에 돌아왔을 때 네가 없는 것이 낯설었다는 말.


앞으로 십팔 년 동안 이어질 편지가 여기서 시작한다. 뒤로 갈수록 편지는 무거워진다. 돈 이야기가 나오고,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고,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되겠느냐고 묻는 문장까지 나온다.


하지만 시작은 이렇게 가볍다. 네가 없으니 집이 낯설더라는 말이다.



스물일곱



다음 사진 속 안내판에는 이런 문구가 보인다.


Van Gogh only found his true calling as an artist at the age of 27. Without knowing whether he had any real talent, he set to work with unbridled drive and great determination.

반 고흐는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로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억누를 수 없는 추진력과 대단한 결단력으로 작업에 뛰어들었다.


옆에서 읽던 조카가 말했다.


"삼촌, 나 스물다섯인데 그럼 아직 이 년 남은 거네요. 나도 화가에 도전해도 되겠어요."


"아니야, 넌 재능이 없어."


둘이 웃었다.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시작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조카의 미래를 내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했을까. 지금은 후회가 된다.



해바라기와 가죽 나막신 한 켤레


미술관 안은 예상보다 어수선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앞에 사람이 많았다. 「해바라기」 앞은 더했다.


읽고 간 덕에 그림 앞에서 편지 문장이 떠올랐다.


1888년 여름 아를, 고갱을 기다리며 그는 이렇게 적는다. 이 계획을 실행하면 열두 점쯤 되는 그림이 될 거라고. 그러면 전체가 파랑과 노랑의 심포니가 될 거라고.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매달린다고, 꽃이 금방 시들어 단숨에 그려내야 한다고.


작업실을 온통 해바라기로만 꾸미고 싶다고도 했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고갱은 두 달을 살고 떠났다. 그리고 빈센트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중간에 재미있는 전시가 하나 있었다. 빈센트가 1889년에 그린 「가죽 나막신 한 켤레」와 요즘 사람이 신던 낡은 스니커즈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다. 백삼십여 년을 사이에 둔 두 켤레의 신발이다.


왼쪽 그림: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가죽 나막신 한 켤레(A Pair of Leather Clogs), 1889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발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신발은 어떤가요?

여러분의 신발에는 어떤 경험들이 깃들어 있나요?


잠깐 내 신발을 내려다봤다.


돈이 없어 낡은 구두를 오래 신었을 빈센트와 달리, 나는 열세 날의 여행을 위해 새 운동화를 신고 왔다. 그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에 감사할 뿐이다.





뒤로 돌아가 보라는 뜻


한 방에서 자화상 한 점이 벽이 아니라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뒤로 돌아가 보라는 뜻이다.


뒷면에는 다른 그림이 있었다. 갈색과 흙빛으로 그린 병과 항아리. 뉘넌 시절 그림이다. 앞면은 1887년 파리, 뒷면은 그보다 이삼 년 앞선 네덜란드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년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똑같았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한 점이 유리 상자 안 받침대에 세워져 있었고, 뒤로 돌아가니 감자를 깎는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뉘넌 시절 그림이었다.


두 번 다 앞면은 파리고 뒷면은 네덜란드다.




캔버스를 새로 살 돈이 없어 이미 그린 그림의 뒷면을 썼다. 모델을 쓸 돈이 없어 거울 앞에 앉았다. 파리에 머문 이 년 동안 그린 자화상이 스물일곱 점 가까이 된다. 평생 그린 자화상의 절반이 넘는다.


자화상이 걸린 방, 벽에는 그의 편지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를 아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기를 그리는 것도 쉽지 않다.

1889년 9월, 생레미에서 테오에게 — 편지 800번

https://vangoghletters.org/vg/letters/let800/letter.html


그리기 쉽지 않다던 자화상을, 모델 쓸 돈이 없어 그려야 했던 사람. 그것도 몇 해 전에 그린 그림의 뒷면에 그리고 있었을 빈센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몬드꽃 앞에서


1890년 1월, 테오의 아들이 태어난다.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 큰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이 무렵 쓴 편지가 하나 있다. 내가 읽은 바카라에는 없었고, 돌아와서 편지 전집 사이트에서 찾았다. 수신인이 테오가 아니라 어머니다.


어머니께, 며칠 전부터 답장을 드리려 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버렸습니다. 어머니의 마음도 저처럼 요와 테오에게 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순산했다는 소식이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요. 빌이 곁에 남아 있어 준 것도 참 다행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제 이름보다는, 요즘 부쩍 자주 생각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래도 이미 그렇게 된 일이니, 저는 곧바로 그 아이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부의 침실에 걸어 둘 그림입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뻗은, 흰 아몬드꽃이 핀 큰 가지입니다.

1890년 2월 19일, 생레미 — 편지 855번
https://vangoghletters.org/vg/letters/let855/letter.html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꽃피는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s), 1890년 2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꽃이 핀 가지가 화면 밖까지 뻗어 있다. 그의 그림 중에 가장 밝은 것 같다. 아이 방에 걸릴 그림이니 그랬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다섯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림에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다.


미술관 로비에는 이 그림을 알리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고, 기념품 가게에도 이 그림이 가장 많았다. 왜 이렇게 유명한지 그때는 솔직히 몰랐다.


한국에 돌아와 여행기를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미술관은 빈센트의 조카가 어머니 요한나에게서 물려받은 그림들을 네덜란드 정부에 넘기면서 세워졌다.


자기 탄생을 기념해 큰아버지가 그린 이 그림은 그에게 각별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부각시키지 않았을까. 내 생각엔 그렇다.




끝내지 못한 그림


마지막 전시실 벽에는 「나무뿌리」가 걸려 있었다.


미술관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반 고흐는 오베르 마을 외곽에서 이 풍경을 그렸다. 나무뿌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그려 지평선도 없고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의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는 울퉁불퉁한 나무 줄기와 뿌리, 그 위에 떨어지는 빛을 굵은 붓질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날 오후 그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마지막 문장에서 걸음이 멈췄다.


그날 오전까지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전시실의 마지막 패널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배경 사진은 오베르 묘지의 묘비다. 여기 빈센트 반 고흐 잠들다, 1853~1890이라고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 테오의 묘비가 잘려 보인다.


가운데 사진이 라부 여인숙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것들은 이렇다. 베르나르가 그의 죽음과 장례를 알린 편지, 테오에게 쓰다 만 마지막 편지, 가셰 박사가 임종 자리에서 그린 스케치, 그리고 부고 카드다.


1890년 7월 29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서른일곱이었다.


여섯 달 뒤인 이듬해 1월에 테오가 세상을 떠난다. 서른셋이었다.




남긴 사람


이 챕터를 그림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것 같다.


남겨진 사람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였다. 스물여덟이었다. 갓난아이가 있었고, 팔리지 않는 그림 수백 점과 편지 뭉치가 집에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숙을 치며 아이를 키웠다. 그러면서 그림을 전시에 내보내고 편지를 정리했다. 날짜순으로 맞추고 주석을 달아 1914년에 세 권으로 펴냈다. 남편이 죽은 지 스물세 해 만이었다.


미술관도 그 아이가 남긴 것이다. 1890년 1월에 태어나 큰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가 자라 노인이 되었을 때, 재단을 세워 집에 있던 그림들을 국가에 넘겼다. 그렇게 1973년에 이곳이 문을 열었다.


앞 장에서 품었던 물음이 다시 떠올랐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는 사람이 몰리는데 이준 열사 기념관에는 왜 그렇지 않을까. 아마도 남겨진 일기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빈센트도 그렇다. 이 편지들이 없었다면 그의 이름이 지금처럼 남았을까.



https://blog.naver.com/customs_man/224401173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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