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잠든 방에서
네덜란드에서 서머스쿨을 듣고 있는 첫째 딸은 원래 내일 전 과정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하루 일찍 와서 헤이그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헤이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딸이었다.
"아빠, 오늘 수업이 여기 미술관에서 발표하는 거야. 오전에 선생님하고 다 같이 이동했고, 자유시간 갖고 2시에 만나는 일정이야. 오전에 만날 수 있어?"
이역만리 헤이그에서 딸과 번개로 만나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헤이그에서 만났다. 그리고 함께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여기 기념관에 가기 위해서 소설 『헤이그의 비밀』을 읽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김철 작가가 쓴 소설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세 명의 특사 중 현지에서 사망한 이준 열사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저는 이준의 사망 진단서가 위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일본의 독살설을 제기한다. 그러나 실제 사인은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세 사람이 헤이그에서 활동한 지 스무날 남짓, 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되었다. 그리고 이준은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오랜 여행과 쉼 없는 활동으로 얻은 병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나라의 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오랫동안 퍼져 있던 할복 자결설은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그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 애통해했다는 것.
기념관은 이준 열사가 머물다 숨을 거둔 드용(De Jong) 호텔 건물이다. 헤이그 시내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골목에 있다. 건물 앞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나이 지긋한 여성분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어디에서 왔는지, 딸과 함께 온 것인지 안부를 묻고는 전시관을 하나하나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분이 송창주 관장님이었다. 관장님은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그러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암스테르담 안네의 집에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데, 여기는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서 아쉬워요."
가슴이 뜨끔했다. 이번 여행에서 네덜란드 일정의 무게중심을 안네 프랑크의 집에 두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 역시 신화바카라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짐을 쌌으니까.
두 사람 모두 기억되어야 마땅한데, 세상이 기억하는 크기는 왜 이렇게 다를까.
송창주 관장님과 남편 이기항 원장은 평안도 출신 실향민이다. 1992년 이 호텔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된 후 사재를 털어 건물을 사들였고, 1995년 기념관 문을 열었다. 유럽에 하나뿐인 독립운동 유적지다. 그렇게 삼십 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켜왔다. 낯선 땅에서 지켜온 그 자리에 감사를 드린다.
기념관 안, 이준 열사가 숨을 거둔 침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자리를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셔터를 누르면서도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침대 위는 태극기로 덮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 태극기, 천으로 만든 태극기, 그 사이사이에 빼곡한 손글씨 쪽지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하나씩 두고 간 것이다. 날짜가 적힌 것도 있었다.
벽에는 그가 입었던 것과 같은 회색 정장 한 벌이 걸려 있고, 그 옆에 실물 크기의 사진이 세워져 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정면을 바라보는 사십 대의 얼굴. 반대편 벽에는 사망 진단서와 그의 죽음을 전한 당시 신문 기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생애를 정리한 연표가 붙어 있다.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1963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십육 년 만이었다.
기념관을 나서며 아침에 평화궁 앞에서 떠올렸던 세 사람을 다시 생각했다.
이상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무덤조차 남기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위종은 러시아에 남았다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사가 묘연해졌다. 그리고 이준은 이 건물에서 눈을 감았다.
세 사람 중 누구도 살아서 조국 땅을 밟지 못했지만, 이역만리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후손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은 꼭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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