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덕후의 반나절
암스테르담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다. 반 고흐 미술관과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편지와 일기를 통해 사람과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남은 반나절은 조금 가볍게 보내기로 했다. 맥주 덕후인 내가 꼭 한 번 가 보고 싶던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로 향했다. 초록 병과 빨간 별로 전 세계 맥주 시장을 제패한 하이네켄이 옛 양조장 건물에 차려 놓은 공간이다.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서머스쿨을 듣던 첫째가 수업을 모두 마치고 암스테르담에서 합류했다. 이제부터 노르웨이와 스웨덴과 핀란드까지, 남은 일정은 셋이 함께 간다. 아빠와 딸과 조카. 어느 여행사 패키지에도 없을 법한 조합이다.
딸의 짐을 중앙역에 맡겨 두고 셋이 거리로 나왔다. 암스테르담의 많은 집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펄럭이는 깃발만 따로 찍어 두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는데, 돌아와 사진을 다시 넘겨보다 발견했다. 운하를 담으려고 찍은 사진의 왼쪽 끝 집과 오른쪽 끝 집에 그 깃발이 걸려 있었다.
무지개 깃발은 전 세계 성소수자 축제인 '월드프라이드 2026'을 축하하기 위해 내건 것이었다. 다음 날 8월 1일에는 운하에 배 여든 척을 띄우는 퍼레이드가 예정되어 있었다.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 간 혼인을 법으로 인정한 나라가 네덜란드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그만큼 일찍 제도로 인정한 나라답게, 축제도 도시 전체가 함께 벌이는 모양이었다.
딸이 합류한 첫 일정을 맥주 공장으로 잡은 것은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조금 모자란다. 술값이 여행 경비보다 더 나오겠다는 잔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국내 여행도 그렇지만 해외에 나가면 더했다. 맥주 공장과 수도원 양조장과 그 동네에서만 마실 수 있는 로컬 맥줏집을 어떻게든 일정에 끼워 넣었다. 프랑크푸르트의 동굴 맥줏집, 프라하의 수도원 양조장, 잘츠부르크의 맥주 공장, 칭다오 맥주 공장, 아사히 맥주 공장 등이 그 목록이다.
문제는 이 모든 곳을 애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다녔다는 것이다. 애들이 아빠를 닮아 맥주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아주 없지는 않다. 대학생이 된 딸이 하이네켄엔 꼭 가고 싶다고 한 걸 보면 피는 못 속이나 보다.
하이네켄은 하면발효된 라거 계열이다. 맥주 덕후에게는 상면발효된 에일이니 하면발효된 라거니 하는 말이 일상 용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어려우면 어떤가. 한잔 맛있게 마시면 그만이다. 나는 IPA 같은 에일 쪽을 훨씬 좋아하지만, 하이네켄이나 카스 같은 라거도 눈앞에 있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바카라을 읽고 떠나는 여행이 있다면, 맥주를 마시러 떠나는 여행도 있다. 나에게는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 도시를 온전히 이해하는 나만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맥주 덕후는 맥주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와 브랜드를 알아야 한잔이 더 맛있어진다. 무심코 지나쳤던 하이네켄 라벨 한 장에 그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늘 그래 왔듯 라벨을 놓고 하나씩 풀어 본다.
가운데 빨간 별 양옆에 EST. 1873이 적혀 있다. 회사가 하이네켄이라는 이름을 걸고 첫 맥주를 낸 해다. 시작은 그보다 아홉 해 앞선 1864년, 스물두 살의 헤라르트 아드리안 하이네켄이 오래된 양조장을 사들이면서였다. 그는 네덜란드 전통 에일 대신 바이에른식 라거를 택했다. 무엇보다 배에 실어 멀리 보낼 수 있는 맥주였다.
로고에는 작은 글자로 1875년 파리 금메달, 1883년 암스테르담 최고 명예상,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상, 1900년 파리 박람회 심사위원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아래쪽 하이네켄 A효모라는 문구는 1886년 이 양조장에서 분리해 낸 효모를 지금도 전 세계에서 쓴다는 뜻이다.
중앙의 빨간 별은 중세 양조인들이 쓰던 표식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악령을 막아 맥주가 상하지 않게 지켜 준다고 믿어 양조장 문 앞에 걸어 두던 표식이다. 하이네켄은 그 별을 병 한가운데로 옮겨 왔다. 좋은 맥주라는 오래된 보증을 로고 하나로 대신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초록 병이다. 요즘이야 맥주병 색이 다양하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갈색이었다. 하이네켄은 초창기부터 초록 병을 썼고, 갈색 병이 늘어선 진열대에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것만으로 이 맥주는 무언가 다르다는 인상을 만들었다.
1873년에 처음 나온 이름, 초록 병에 붉은 별, 지금까지도 쓰이는 하이네켄만의 A효모, 그리고 각종 상까지. 라벨 한 장에 이렇게 많은 생각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제 하이네켄 맥주를 보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분명 더 애착을 가지고 마시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건물에서 맥주를 만들던 것은 1988년에 끝났다. 빈 건물은 2001년 하이네켄 익스피리언스가 되었다. 맥주를 만들던 자리가 맥주 스토리를 파는 자리가 된 것이다.
아쉽게 건물 외벽은 공사 중이었다. 가림막 아래로 'Heineken Experience'라는 흰 글씨만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가림막까지 초록이었다. 이 건물에 초록 아닌 자리는 없는 모양이다.
입구의 초록 상자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의 이야기를 맛보라는 문구와, 홉(hoppy)과 해피(happy)를 겹쳐 놓은 말장난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길이니 나도 이미 해피(hoppy)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천장이 온통 초록 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맥주 천국이라면 이런 곳일까. 저 중에 내가 마신 병도 하나쯤 있으려나.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못 보던 맥주가 있었다. 앞서 거리에서 본 성소수자 축제인 '월드프라이드 2026'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한정판이었다. 빨간 별 하나를 무지개색 별 다섯 개로 바꾸고 'All stars unite'라고 적은 병이다. 여기서만 살 수 있는 한정판이었는데, 하나 사서 마셔 볼 걸 그랬다. 성소수자 후원 재단에 기부도 하고.
진열장에는 'HEINEKENPLEIN', 즉 하이네켄 광장이라고 적힌 초록색 도로 표지판도 있었다. 비행기 위탁 수하물 무게를 걱정하다가 그냥 나와 버렸다. 집 현관에 붙여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여행에서 사지 않은 물건은 늘 사 온 물건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다.
노르웨이로 넘어가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공장 내부 투어는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끊은 표는 하이네켄 플래그십 크루즈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운데 놓인 커다란 맥주 얼음통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 캔과 파란 캔이 얼음에 반쯤 묻혀 있고, 그 사이로 이탈리아 맥주 캔도 섞여 있었다.
"이것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나요?"
농담으로 물었더니 정색을 하면서 아니란다. 1인당 두 캔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옆에서 딸이 아빠 부끄럽다며 잔소리를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운하 크루즈는 꼭 한번 타 보고 싶었다. 배를 타고 물 위에서 도시를 구경하는 색다른 경험에 맥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1인당 두 캔이라 아쉽지만.
한 시간 남짓한 뱃길 내내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영어였다. 딸과 조카는 잘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나는 띄엄띄엄이다. 그중 간신히 알아들은 것은 오늘은 원래 항로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다음 날 퍼레이드를 앞두고 배들이 자리를 잡느라 중심부 물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내일은 이 물길을 여든 척이 줄지어 지나갈 것이다.
재미있는 장면도 있었다. 어느 집 창문이 열리더니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몸을 반쯤 내밀고 피자 상자를 배로 건넸다. 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큼직하게 피자 주문은 여기로 전화하라고 적혀 있었다. 간판도 메뉴판도 없이 창문 하나와 전화번호 하나가 전부인 가게였다. 피자가 건네지는 순간을 제대로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조금 더 가자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요트 뱃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선 아이와, 튜브에 몸을 걸친 채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아이였다. 물빛은 솔직히 탁했다. 그런데 가이드는 연신 물이 깨끗하다고 홍보했다.
돌아와 찾아보니 가이드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400년 만에 가장 깨끗하다고 할 만큼 수질이 좋아졌다고 한다. 다만 시는 여전히 운하에서 수영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물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배가 다니는 길이라 위험해서였다.
2박 3일 같은 1박 2일이었다. 다음에 네덜란드에 다시 온다면 로테르담과 위트레흐트 같은 소도시에 가 보고 싶다. 그리고 벨기에 브뤼헤와 브뤼셀까지 넘어가 보고 싶다. 물론 이번에 못 가 본 양조장과 로컬 맥줏집을 하나씩 끼워 넣어서. 목록은 이미 머릿속에 있다. 파워 J의 여행은 늘 목록에서 시작된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해 전광판을 올려다보니 오슬로행 21시 45분 비행기가 22시 15분으로 밀려 있었다. 붉은 글씨의 지연 안내와 게이트 변경 안내가 나란히 떠 있었다. 변경된 게이트를 나중에야 알고서 허겁지겁 달린 기억이 있다.
이제 다음 국가인 노르웨이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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