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헤이그 평화궁

헤이그 특사를 기억하며

by간서치

암스테르담 호텔에 짐을 맡기고 열차를 타고 바로 헤이그로 향했다.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예약은 열 시였지만, 헤이그에 도착하니 일곱 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일정상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헤이그 평화궁에 가기로 했다.


역에서 나서자마자 자전거가 쌩하고 지나쳤다.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런지 속도가 상당했다. 두리번거리는 사이 자전거를 탄 사람이 손을 내밀어 수신호를 보낸다. 처음엔 비키라는 줄 알았다. 네덜란드에선 그것이 방향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잠깐 기분이 상했던 것은 완전한 오해로 끝났다. 트램 선로가 깔린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이른 아침부터 열린 벼룩시장도 구경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도시를 현지인들과 함께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걸어서 삼십 분, 헤이그 평화궁 앞에 섰다.


이 도시에 오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1907년 여름, 여기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세계 마흔여 개국이 모여 전쟁과 평화의 규칙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대한제국은 그 회의에 세 명의 특사를 보냈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특사는 세 사람이었다.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통역관 이위종.


조약의 위법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 법을 아는 사람, 그것을 세계의 언어로 옮길 수 있는 사람. 고종은 그렇게 세 사람을 선택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다. 그 조약이 어떤 절차로 만들어졌는지 회의석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고, 만국공법에 밝은 학자이기도 했다. 특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서희 일행이 모든 것을 잃고 흘러들어 정착하는 그 용정이다. 소설 속 사람들이 국경 너머에서 살길을 찾던 그 땅에, 조선인 학교가 서 있었다.


이준은 법률가였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하고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되었으니, 대한제국 1세대 검사였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도 마쳤다.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는 법정에 있었다. 1906년 평리원 검사로 복직한 그는, 사면 대상자 명단을 정해놓고 그대로 작성하라는 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은사안 작성은 검사의 고유 권한이라는 이유였다. 오히려 상관인 형사국장을 고소했고, 그 일로 파면당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는 헤이그로 향한다.


이위종은 당시 스무 살,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었다.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이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헤이그가 아니라 『토지』 2부의 한 장면에서였다. 소설을 읽다가 이범윤이라는 인물이 나왔고, 찾아보니 그의 형이 이범진, 그 아들이 헤이그 특사 이위종이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의 최측근 이경하다.


그런데 이경하라는 이름을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남원의 송흥록 생가를 답사하며 들었던 이야기 속에서다. 진주 병사 이경하의 수청 기생으로 끌려간 맹렬이와 소리꾼 송흥록의 애절한 사랑. 그 진주 병사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소설 속 한 인물의 이름을 좇다가 헤이그 특사의 아버지를 만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남원 생가 마당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 일행이 정착한 용정과 연해주는 이상설과 이범윤이 싸우던 바로 그 땅이기도 하다. 소설과 현실이 섞인 채로 남원에서 용정으로, 연해주에서 헤이그까지 이어지는 나만의 이야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1907년의 그들은 두 달이 걸렸다.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서. 돌아올 기약도 없이.


이준은 1907년 4월 말 서울을 떠났다. 나가사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고, 그곳에서 용정에서 온 이상설과 만났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올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이 합류했고, 세 사람은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베를린을 거쳐 6월 25일 헤이그에 들어섰다. 그렇게 두 달이 걸린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 앞에서 막혔다.


실제 회의가 열린 곳은 헤이그 기사의 전당(Ridderzaal)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평화궁은 그때 아직 없었다. 1907년에 착공해 1913년에 완공되었으니, 세 사람이 이 도시에 왔던 그해 이 자리에는 건물이 서 있지 않았다. 그러니 세 특사가 이 문 앞에 선 적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문 앞에 서고 싶었다. 정의와 국제적 연대를 상징하겠다고 지어진 이 건물 앞에서, 정의를 호소하러 왔다가 문전에서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고 싶었다.


일제의 방해로 세 사람은 기사의 전당(Ridderzaal)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초청국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의 대표를 회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두 달을 걸려 도착한 사람들에게 돌아온 답은, 당신들은 이 문을 통과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회의장에 들어가는 대신 거리에서 싸웠다. 이위종이 국제기자단 회견장에 섰다. 프랑스어로 한 그 연설의 제목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였다. 스무 살 청년의 목소리는 각국 신문에 실렸고, 친일 언론조차 주목했다. 그러나 회의는 끝까지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이곳 평화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부는 국제 재판 일정 때문에 관람이 제한되고, 사전 예약된 가이드 투어나 방문자 센터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예약 없이 불쑥 찾아간 나로서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19년 전, 이 도시 어딘가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을 세 사람을 생각하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셔터를 누르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평화궁을 나와 실제 회의가 열렸던 기사의 전당(Ridderzaal)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도 들어가지 못했다. 공사가 한창이라 회의장 입구는 가림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건물 끝쪽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날의 회의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나마 카메라에 담았다.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 오늘 아침 내가 한 일은 계속 그것이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