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중도가 설 자리가 없다
정치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중도라는 넓은 공간이 존재했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방과 타협하고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정치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변화는 이 오래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극우의 마린 르펜과 극좌의 장뤽 멜랑숑이 동시에 세를 키우고 있다.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정치적 노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치의 중심이 비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중도가 사라지는 이유는 국민이 갑자기 극단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존의 중도정치가 국민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해도 자신의 삶은 나아지지 않고, 일자리는 불안하며, 주거비와 생활비는 높아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커진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국민이 정치에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민은 정치 자체를 바꾸려 한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극단적인 정치다. 극우는 “국민을 먼저 챙기겠다”라고 말하고, 극좌는 “기득권을 무너뜨리겠다”라고 말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기존 질서를 더 이상 믿지 말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정치가 무능할수록 이런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마크롱의 프랑스는 이 역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크롱은 좌파와 우파라는 낡은 구도를 넘어선 새로운 중도정치를 내세웠다. 한때 그는 프랑스 정치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프랑스 정치에서 나타나는 것은 중도의 승리가 아니라 중도의 붕괴다. 마크롱 이후의 정치공간에서 극우와 극좌가 동시에 약진하고 있다. 중도정치가 국민의 불안을 흡수하지 못하면 그 빈자리를 양극단이 차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극우와 극좌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극우는 극좌의 과격성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극좌는 극우의 위협을 자신의 결집 명분으로 이용한다. 서로를 악마화하면서 오히려 서로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킨다. 정치가 이렇게 되면 국민은 정바카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막기 위해 투표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정바카라 경쟁에서 진영 전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이미 우리 정치에서도 상대 진영을 설득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바라보는 현상이 심각하다. 정치인은 자신의 정바카라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설명하기보다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를 증명하는 데 열중한다.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정바카라의 성공 여부보다 어느 진영에서 나온 정바카라인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렸다.
이런 정치에서는 중도층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 중도란 정치적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중도는 현실을 보면서 필요하면 좌파적 정바카라도 받아들이고, 필요하면 우파적 정바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시장이 필요한 곳에서는 시장을 인정하고 국가가 개입해야 할 곳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인정한다. 개혁이 필요하면 개혁하고, 개혁의 부작용이 크다면 속도를 조절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그런데 양극화된 정치에서는 이런 태도가 ‘기회주의’로 공격받는다. 진영을 명확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취급된다. 상대방의 정바카라을 일부라도 인정하면 변절자가 된다. 정치적 판단에 필요한 것은 이념적 충성심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인데, 양극화된 정치에서는 오히려 반대가 된다.
결국 정치인은 국민을 설득하는 대신 지지층을 자극하게 된다. 합리적인 정바카라보다 강한 언어가 더 많은 박수를 받는다. 타협보다 투쟁이 정치적 자산이 되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법보다 단순하고 과격한 구호가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정치의 포퓰리즘화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극단적인 정치는 처음에는 시원해 보이지만 실제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하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국가경제를 운영하려면 시장과 복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고, 외교를 하려면 이상과 국익을 조정해야 하며, 노동정바카라을 만들려면 노동자와 기업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상은 정치 구호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중도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 중도는 좌우의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현실과 이념 사이를 연결하는 정치적 공간이다. 개혁을 포기하는 것이 중도가 아니며, 보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급진적인 변화가 슬롯 전체에 어떤 비용을 가져오는지 계산하고, 필요한 변화는 과감하게 추진하되 감당할 수 없는 부작용은 줄이는 것이 진정한 개혁정치다.
문제는 지금 정치권이 이런 정치를 점점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지지층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정당은 다음 선거를 걱정하며, 언론과 소셜미디어는 자극적인 말을 확대한다. 그 결과 정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타협과 설득이 약해진다. 정치는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진영을 위한 동원 수단으로 변한다.
중도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불안정해진다. 극우와 극좌가 서로를 공격하면서 정치적 공간을 장악하면 합리적인 시민은 정치에서 멀어진다. 침묵하는 다수가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빠져나가고,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들만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 극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극우가 왜 성장하는지, 극좌가 왜 힘을 얻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반드시 기존 정치의 바카라임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불안과 분노를 해결하지 못한 정치가 그 불안과 분노를 이용하는 정치세력에게 정치적 공간을 내준 것이다.
중도가 죽는 것은 국민이 중도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중도정치가 국민에게 보여준 성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다시 중도의 공간을 회복하려면 먼저 말부터 바꿔야 한다.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하고, 지지층에게 듣기 좋은 말보다 국민에게 필요한 말을 해야 한다. 이념보다 현실을 보고, 선거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결국 극단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은 또 다른 극단주의가 아니다.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유능한 정치다.
국민의 삶이 안정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기면 극단주의의 정치적 매력은 약해진다. 반대로 국민이 불안하고 정치가 무능하면 극단주의는 언제든 다시 등장한다. 프랑스의 오늘은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중도가 설 자리가 없는 정치의 끝에는 반드시 새로운 극단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극단을 탓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정치적 공간을 내주었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정치권이라면, 아무리 거창하게 개혁을 외쳐도 결국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극단주의를 키우는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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