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 욕망을 더 사랑하는가?

사랑은 상대를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는 일이다

byFrancis Lee

“여자는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

아주 오래된 속설이다. 착하고 성실한 남자보다 거칠고 반항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남자에게 여자가 더 끌린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남자에게도 팜므파탈이 있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사로잡고 결국 그의 인생까지 뒤흔드는 여자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훨씬 오래되고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다.

인간은 왜 자신에게 좋은 사람보다 자신을 강하게 흔드는 사람에게 끌리는가.

왜 안정적인 사랑보다 불안한 사랑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가.

왜 나를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무덤덤하면서 나를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집착하는가.

그리고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욕망을 사랑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라면 인간의 사랑을 그다지 낭만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였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한다. 욕망이 충족되면 잠시 만족하지만 곧 새로운 욕망이 나타난다.

사랑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얻고 나면 욕망은 약해지고, 익숙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다른 자극을 찾는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빌리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기보다 욕망에 끌려다니는 존재에 가깝다.

사랑이 때때로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을 원하는 상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갖지 못한 사람을 갈망하고, 멀어지는 사람을 쫓고, 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더욱 매달리는 현상은 그래서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욕망은 대상보다 결핍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문제를 더욱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간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왜 특정한 사람에게 유난히 끌리는지, 왜 반복해서 비슷한 유형의 관계에 빠지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리로는 “이 사람은 나에게 좋지 않다”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계속 그 사람에게 향한다.

이성은 브레이크를 밟는데 욕망은 계속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인간은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행동을 한다.

여기에서 ‘나쁜 남자’의 역설이 등장한다.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나쁜 특성 가운데 일부가 다른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만함은 자신감처럼 보이고, 무바카라임은 자유로움처럼 보이며, 지배욕은 리더십처럼 보이고, 냉정함은 신비로움처럼 보인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것을 매력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대상을 자기 방식으로 재창조한다.

니체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확대하고 강화하려는 존재라고 보았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흔히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오해되지만, 보다 넓게 보면 자신의 능력과 생명력을 확장하려는 힘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강렬한 사람에게 끌리는 현상도 다르게 읽힌다.

우리는 때때로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가진 힘을 욕망한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보면 나도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험적인 사람을 만나면 내 삶도 갑자기 넓어지는 것 같다.

슬롯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의 가치까지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상대방을 향한 욕망인 동시에 ‘그 사람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욕망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통해 변화된 나를 원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르네 지라르가 등장한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단순히 “내가 저 사람을 원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지라르가 말한 ‘모방욕망’이다.

A가 B를 원한다.

그러면 C는 B 자체보다 A가 B를 원한다는 사실 때문에 B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욕망에는 ‘모델’이 끼어든다.

이것은 사랑에서도 놀라운 방식으로 작동한다.

누군가에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은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반대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낮아 보일 수 있다.

“모두가 저 사람을 원하는데 왜 나는 저 사람을 원하지 않는가?”

이 순간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침투한다.

연애에서 경쟁이 발생하면 감정이 더 강렬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를 거절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원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가치가 갑자기 상승한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경쟁자가 나타나는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그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라진 것은 나의 욕망이다.

이것이 지라르의 이론이 사랑을 설명하는 데 매우 강력한 이유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경쟁과 결합하면 사랑은 쉽게 소유욕으로 변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가 어느 순간 “나는 당신을 가져야 한다”로 바뀐다.

사랑과 소유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나쁜 남자’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설명된다.

그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신의 삶에 몰두하고 있고, 다른 사람의 인정에 관심이 없으며, 때로는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다.

그는 희소해 보인다.

그리고 인간은 희소한 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욕망은 대상의 객관적인 가치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특별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사람이 정말 특별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사람을 특별하게 욕망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사랑의 가장 위험한 착각이 발생한다.

“내가 이렇게 강하게 느끼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분명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감정의 강도는 상대방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인 측정치가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나의 결핍과 불안의 크기를 측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동시에 인간을 가장 쉽게 속이는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상화한다.

그의 결점을 설명해주고, 그의 냉정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의 무바카라임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그의 폭력적인 행동조차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나의 서사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서사가 무너지면 사랑도 무너진다.

이것이 나쁜 남자와 팜므파탈의 비극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악마의 얼굴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매력적인 인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력과 선함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매력은 도덕적 품격과 아무 관계가 없다.

똑똑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매력적인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자신감 있는 사람이 바카라임감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가장 쉽게 잊힌다.

그래서 좋은 사람과 매력적인 사람은 반드시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과 나에게 좋은 사람도 반드시 같은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에서 가장 어려운 구별이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한가.

아니면 그 사람을 얻기 위해 애쓰는 동안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가.

나는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성장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증명하는가.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평온해지는가.

아니면 그 사람 때문에 불안해지는가.

이 질문에 답하다 보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은 욕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 의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니체가 말한 힘에의 욕망, 지라르가 말한 모방욕망은 서로 다른 철학적 체계에서 출발했지만 묘하게 한 지점에서 만난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욕망은 과거의 경험과 결핍, 경쟁심, 인정욕구, 무의식, 슬롯적 모방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인 동시에 가장 복잡한 심리적 조건들의 충돌이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 욕망이 없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사랑도 시작되지 않는다.

문제는 욕망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욕망은 “나는 당신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나는 당신이 잘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

욕망은 소유하려 한다.

사랑은 존중한다.

욕망은 상대가 나를 채워주기를 원한다.

사랑은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인정한다.

욕망은 강렬할수록 진짜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반드시 강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어쩌면 성숙한 사랑의 핵심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의심하는 데 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원하는가.”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이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인가.”

“나는 이 사람을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인가.”

“나는 이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가, 아니면 이 사람을 얻음으로써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가.”

이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사랑은 조금 덜 눈멀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인간이 사랑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자신의 욕망에 사랑을 바치게 된다.

그러니 사랑의 가장 큰 적은 나쁜 남자도, 팜므파탈도 아니다.

진짜 적은 자기 욕망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사랑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욕망이 우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인간의 비극은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갈망하고 있었고,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집착하고 있었으며,

상대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그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결국 한 사람을 얻는 능력이 아니라, 내 욕망이 나를 속이고 있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묻게 된다.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당신을 욕망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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