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 우산

by한울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던 시간을 더 오래 기억하기도 한다.

남자는 버스를 운전했다.


스물일곱 해 동안 같은 노선을 오갔다. 첫차 조와 막차 조를 한 주씩 번갈아 맡았다. 첫차 주간에는 새벽에 차를 몰고 나갔고, 막차 주간에는 밤늦게 차고지로 돌아왔다. 계절이 바뀌어도 정류장의 이름은 같았고, 승객들이 내리는 순서도 대체로 비슷했다.


그는 승객의 얼굴을 잘 기억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타는 회사원, 늘 맨 뒷자리에 앉는 학생, 교통카드를 찾느라 가방을 뒤지는 할머니.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목적지를 묻는 일은 운전기사의 일이 아니었다.


그의 일은 문을 열고, 문을 닫고, 정해진 시간에 출발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내릴 때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백미러로 짧게 웃어 보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집에는 아내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년 전부터 서로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낮에 일했고 남자는 새벽이나 밤에 일했다. 쉬는 날이 겹치면 함께 장을 보러 갔고,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밥을 먹었다.


아내가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똑같지, 뭐.”


아내는 더 묻지 않았다.


그에게도 특별히 불행한 일은 없었다. 월급은 제때 들어왔고, 몸은 아직 버틸 만했다. 다만 지나온 날들을 떠올리면 비슷한 풍경만 이어졌다. 정류장, 신호등, 차창에 비친 얼굴들.


그는 가끔 자신이 운전한 버스에 몇 명이나 탔을지 가늠해 보았다. 수천 명이었을 수도 있고, 수만 명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중 누군가에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우스웠다.


버스 기사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겠는가.


십사 년 전 가을, 비가 내리는 저녁이었다.


그날도 퇴근 시간이 지나자 도로가 막혔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남자는 앞유리에 번지는 빗물을 보며 와이퍼 속도를 한 단계 올렸다.


저녁 여덟 시쯤, 열 살 안팎의 아이가 버스에 올랐다. 교복도 아니고 학원 가방도 없었다. 아이는 교통카드를 찍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 젖은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와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십 분쯤 지났을 때,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남자는 백미러를 보았다.


“왜?”


“이 버스, 우리 동네 가요?”


“동네가 어딘데?”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비에 젖어 글씨가 번져 있었다.


“길을 잃어버렸어요.”


남자는 다음 정류장에 버스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운행 관리실에 연락해 상황을 알렸다. 아이가 말한 주소와 주변 지명을 확인하는 동안, 아이는 앞자리에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뒤쪽에서 승객들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아이에게 말했다.


“서두를 거 없다. 아저씨가 기다릴게.”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엄마한테 전화할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전화번호를 몰라요.”


“그럼 이름은?”


아이는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엄마가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어디서 기다리라고 했는지 잊어버렸어요.”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혼자 버스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관리실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지구대에 연락했다. 승객들이 조금씩 불평했지만 남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이는 앞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뒤 경찰이 도착했다.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려 할 때, 남자는 자기 우산을 내밀었다.


“비 많이 오니까 쓰고 가.”


아이는 우산을 받아 들었다.


“아저씨는요?”


“아저씨는 버스 안에 있으니까 괜찮아.”


아이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고맙습니다.”


버스 문이 닫혔다. 남자는 백미러로 아이가 경찰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남자는 차고지에서 집까지 비를 맞고 걸어온 터였다.


“오늘은 왜 늦었어? 우산은 어쩌고?”


“애 하나가 길을 잃었더라고. 우산은 그 애 줬어.”


“그래서?”


“경찰에 인계했지.”


아내는 잠시 그를 보더니 말했다.


“젖었네. 얼른 갈아입어. 밥은 먹었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남자는 다음 날에도 버스를 몰았고, 아이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우산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아까웠다. 오래 쓴 우산이었고, 아내가 사 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우산 생각은 흐려졌다.


그저 비 오는 날이면 가끔 그날의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집에 잘 돌아갔을까.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정류장에 도착하면 문을 열어야 했고, 승객이 타면 출발해야 했다.


그렇게 십사 년이 흘렀다.


정년퇴직하는 날, 동료들이 작은 케이크를 준비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촛불을 껐다. 다들 고생했다고 했고, 이제 편하게 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떠올렸다.


아이가 우산을 받아 들던 날이었다.


왜 그날이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구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무사히 경찰에게 인계되었고, 자신은 다음 날 다시 운전대를 잡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자신이 정해진 노선을 달리는 기계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의 목적지가 아니라,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함께 있었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하루만 유독 선명하다는 것이었다.


스물일곱 해 동안 수많은 사람을 태웠는데, 꺼내 볼 수 있는 하루는 그날뿐이었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나머지 날들은 텅 빈 정류장처럼 느껴졌다.


비가 오면 아이가 생각났다. 집에는 잘 갔는지, 자신을 기억하는지, 그날 자신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증거를 그 아이에게서 찾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산 하나 건넨 일을 평생 기억할 만큼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며칠 뒤, 남자는 골목을 걷다가 낡은 나무문 하나를 발견했다.


간판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맡기면,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려드립니다.’


남자는 한참 그 문장을 읽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반마다 작은 상자들이 빼곡했다. 상자마다 이름과 하루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가게 주인이 물었다.


“어떤 하루를 맡기시겠습니까?”


“비 오는 날이요. 아이한테 우산을 빌려줬던 날입니다.”


“그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입니까?”


“네. 별일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날이 자꾸 생각납니다.”


“그런데 왜 맡기시려 합니까?”


남자는 대답을 찾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날 하나가 있어서 나머지 스물일곱 해가 텅 빈 것 같습니다. 비만 오면 그 아이가 저를 기억하는지, 제가 정말 도움이 됐는지 따지게 됩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나이까지 그런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제가 좀 우습습니다.”


주인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규칙을 말했다.


“하루를 맡기면 그날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맡긴 하루 하나당 다른 사람의 하루를 하나 빌려 가실 수 있습니다. 다시 돌려받으시려면 빌린 하루를 모두 반납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가장 소중한 하루를 값으로 내놓으셔야 합니다. 값으로 낸 하루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을 붙입니다. 뭐라고 쓸까요?”


“우산을 빌려준 날이요.”


주인은 그대로 적었다.


남자가 카드를 건네는 순간 그날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비 오는 날 누군가에게 우산을 빌려줬다는 제목만 남았다. 누구에게, 왜 빌려줬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잃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빌릴 하루를 고르시겠습니까?”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했던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하루를 살아 보고 싶습니다.”


주인은 선반 사이로 걸어갔다. 한참 뒤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상자에는 ‘기다려 준 아저씨’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 하루를 빌리시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날 밤, 그는 어느 아이의 몸으로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가 젖어 있었고, 주머니에는 구겨진 종이가 들어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젖은 우산 냄새가 났다. 창밖은 어두웠고 아는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무섭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정말 길을 잃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아이는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용기를 내어 운전석 쪽으로 말을 걸었다. 백미러 속에서 눈가에 주름이 깊은 아저씨가 아이를 보았다. 낮고 조금 쉰 목소리였다.


버스가 서고 비상등이 켜졌다. 뒤쪽 어른들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저씨가 말했다.


“서두를 거 없다. 아저씨가 기다릴게.”


아이는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따라 했다.


기다릴게.


이 큰 도시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경찰이 왔다. 내릴 때 아저씨가 우산을 내밀었다. 아이는 우산을 가슴에 안고 걸었다. 어른 키에 맞춘 우산은 길어서 끝이 땅에 끌렸다.


밤늦게 어머니가 지구대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아저씨가 기다려 줬어. 우산도 줬어.”


“이름은 여쭤봤어?”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제일 속상했다.


“우산 돌려드려야 하는데.”


“그래. 꼭 돌려드리자.”


그날 밤 아이는 우산을 머리맡에 세워 놓고 잤다. 내일은 그 버스 번호를 찾아봐야지. 아저씨 얼굴을 잊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남자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작은 손과 우산 손잡이의 감촉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무서웠던 마음,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준다는 말이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하루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던가. 낯선 어른이 건넨 짧은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 이토록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그날의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맡기고 온 하루와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자신이 빌린 하루 속에서 한 아이가 누군가의 친절을 얼마나 오래 간직할 수 있는지 보았다.


남자는 한동안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가게로 향했다.


“제 하루를 돌려받고 싶습니다.”


주인은 그를 바라보았다.


“빌린 하루를 반납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하루 하나를 값으로 내놓으셔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빌린 카드를 내려놓았다. 젖은 소매의 감촉과 우산 끝이 땅에 끌리던 소리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이가 우산을 안고 잠들던 밤의 온기만 희미하게 남았다.


주인이 물었다.


“값으로 내놓을 하루는 정하셨습니까?”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하루는 아내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비가 내리던 버스 정류장에서 아내는 우산 없이 서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우산을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같은 버스를 탔고, 내리는 정류장이 같다는 사실에 함께 웃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결혼했고, 함께 살았고,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남자는 그 하루를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잃는 일이었다. 함께 살아온 세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세월의 시작을 자기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그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이곳에 왔다. 그런데 그 답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내놓아야 한다니.


어쩌면 자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값을 치르는 데 익숙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조차 확인받아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아이의 하루를 경험한 뒤, 남자의 마음에는 낯선 감정이 남았다.


길을 잃은 아이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아이에게 낯선 어른이 건넨 짧은 말 한마디는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남자는 그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도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건넨 적이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 역시 누군가의 작은 친절을 오래 기억하며 살아온 적이 있었을까.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빌린 하루는 다른 사람의 기억이었고, 자신이 맡긴 하루는 여전히 안갯속에 있었다.


그는 다만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래 간직할 만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날을 돌려받겠습니다.”


그날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가장 행복한 하루로 남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답을 확인하고 싶었다.


주인은 확인하듯 물었다.


“이 하루를 내놓으면 그날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아내분을 처음 만난 순간도, 함께 웃었던 이유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남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하루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말 한마디를 붙잡고 안심하던 아이, 우산을 돌려주지 못해 아쉬워하던 아이. 그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누군가의 작은 친절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저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인하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데 제가 빌린 하루를 살아 보니, 누군가에게는 잠깐 건넨 친절도 오래 기억할 만한 일이 될 수 있더군요.”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맡긴 하루도 그랬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이제는 그 답을 꼭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주인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카드를 받아 상자에 넣었다.


상자 뚜껑이 닫혔다.


남자는 아내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려 했다. 비가 내렸다는 사실만 희미하게 남았다. 정류장도, 우산도, 함께 웃었던 얼굴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은 오래된 상자 하나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그가 처음 맡겼던 하루였다.


상자를 열자 카드 한 장이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돌아왔다.


젖은 소매, 구겨진 종이, 번진 주소, 비상등이 딸깍거리던 소리, 내밀던 우산. 그는 그 모든 것을 다시 보았다. 서두를 거 없다, 아저씨가 기다릴게, 하고 말하던 자신의 목소리까지.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빌렸던 하루는, 십사 년 전 자신이 우산을 건넸던 아이의 하루였다.


그 아이는 훗날 그날을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하루로 맡겼던 것이다.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우산을 건넸던 순간도, 아이가 고맙다고 말하던 목소리도. 그러나 그 아이가 그날을 어떻게 기억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도 자신은 그 아이의 하루가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이제야 두 기억이 하나로 이어졌다.


자신에게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하루였지만, 아이에게도 그날은 잊고 싶지 않은 하루였던 것이다.


남자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아이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기억하는지, 그날의 우산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날 자신은 아이를 기다려 주었고, 아이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군가에게는 별일 없이 지나간 하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하루가 될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생각했다.


가게를 나서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었다. 남자는 잠시 골목 입구에 서 있다가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현관에서 말했다.


“비 맞았네. 우산 안 들고나갔어?”


“응. 깜빡했어.”


“당신은 참 한결같다.”


그날 저녁, 그는 아내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아내는 반찬을 하나 더 집어 그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잠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맛있네.”


아내가 웃었다.


“맨날 먹는 건데 뭘.”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오래 웃었다.


아내가 젓가락을 들다 말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처음 만난 날도 비 왔잖아. 당신이 우산 씌워 줬는데.”


남자는 잠시 아내를 보았다.


“그랬나?”


“기억 안 나? 벌써 깜빡깜빡하네.”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내가 말하는 날은 분명 자신이 살아온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또 얘기해 줘.”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젊은 여자와, 우산을 들고 머뭇거리던 젊은 남자에 대해서.


남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들었다. 이야기 속의 젊은 남자는 낯설었다.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아내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이제 그날은 두 사람에게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비는 밤새 내렸다.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우산을 하나 샀다. 그리고 현관 앞에 두었다.


언젠가 누군가 비를 맞고 서 있다면, 다시 빌려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빈 그릇을 남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