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는 아직 쓰지 않았다

by한울

도서관에는 바카라을 끝까지 읽지 않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늘 창가에서 두 번째 바카라상에 앉았다.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종잇조각을 끼웠고, 어떤 문장은 수첩에 옮겨 적었다. 반납할 때면 바카라의 마지막 장이 남아 있었다.

그가 쓰는 이야기도 비슷했다.

노트북에는 제목만 적힌 문서가 쌓여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집을 떠난 사람, 돌아오지 않는 사람. 인물들은 늘 무언가를 기다리다 멈췄다.

마지막 문장을 쓰면 그들의 시간이 끝날 것 같았다. 더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새로운 곳으로 떠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결말을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오래된 상자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신던 구두였다.

갈색 가죽은 군데군데 색이 바랬고, 오른쪽 뒤축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밑창에는 가느다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누르자 가죽이 들렸다가 다시 붙었다.

버릴 만큼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신을 수도 없었다.

그는 구두를 상자 옆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 귤을 까곤 했다. 남자가 방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방문을 두드렸다.

“다 썼냐?”

“아직요.”

“그럼 나중에 읽어 줘라.”

남자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다 쓰면요.”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귤껍질을 한 곳에 모으고 남은 귤 두 개를 접시에 담아 방문 앞에 두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글을 재촉하지도, 잘 쓴다고 칭찬하지도 않았다. 그저 언젠가 아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고 싶어 했다.

남자는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며칠 뒤, 그는 구두를 종이 가방에 담아 골목 안쪽의 수선집으로 가져갔다. 낡은 간판 아래로 가죽 냄새가 새어 나왔고, 안에서는 망치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이거 고칠 수 있습니까?”

사장은 구두를 받아 뒤축과 밑창을 살폈다.

“오래 신으셨네. 뒤축도 한쪽만 닳았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칠 수 있지. 아직 멀쩡한 데도 많구먼.”

“오래된 건데요.”

“오래됐다고 못 고치는 건 아니니까.”

사장은 구두를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일주일쯤 걸려. 맡기고 가.”

“신을 건 아닙니다.”

“그럼 장식으로 둘 건가?”

남자가 웃었다.

“그냥 버리기가 좀 그래서요.”

사장은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버릴지 말지는 주인이 정하는 거지.”

남자는 더 묻지 않고 구두를 맡겼다.

그날 밤, 바카라상 서랍에서 오래된 수첩을 발견했다. 첫 문장만 적힌 이야기들 사이에 짧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

다 쓰면 읽어 주기.

자신의 글씨였다.

누구에게 한 약속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킬 날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며칠 동안 문장을 고쳐 보았지만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인물은 문 앞에 서 있었고, 기다리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결말을 쓰려다 노트북을 닫았다.

다음 날, 도서관 게시판에서 낯선 안내문을 발견했다.

하루를 맡기고 싶으신 분은 별도 문의 바랍니다.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맡긴 하루 하나당 다른 사람의 하루 하나를 빌릴 수 있습니다.

장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내문에 적힌 주소는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골목 안쪽이었다.

사흘을 망설인 끝에 그는 그곳을 찾아갔다.

작은 방 안에는 바카라상과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카라상 뒤의 중년 남자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맡긴 하루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맡긴 하루 하나당 다른 사람의 하루 하나를 빌릴 수 있습니다.

맡긴 하루를 되찾으려면 빌린 하루를 모두 돌려주고, 가장 소중한 하루를 대가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 기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종이를 읽다가 물었다.

“빌린 하루는 제 기억이 되는 겁니까?”

“그 하루를 경험하고 기억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손님이 살아온 과거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맡긴 하루를 되찾으려면 다른 기억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가게 주인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남자는 종이를 한참 바라보다 돌려놓았다.

“아직은 맡기지 않겠습니다.”

그날 저녁, 그는 빈 상자 옆에 놓인 수첩을 펼쳤다.

다 쓰면 읽어 주기.

메모를 한참 바라보다 다시 덮었다.

다음 날, 남자는 하루를 빌려주는 가게를 찾아갔다.

“맡기고 싶은 하루가 있습니다.”

“어떤 하루입니까?”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보내던 날입니다. 제가 글을 쓰고 있으면 다 썼느냐고 물으시던 날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날이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하루를 맡겼다.

가게를 나왔을 때, 그날의 기억은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을 맡겼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무엇을 그토록 행복하게 여겼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골목에 잠시 서 있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었다.

며칠 뒤, 그는 다른 사람의 하루를 빌렸다.

가게 주인은 누구의 하루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남자도 묻지 않았다.

잠시 뒤, 낯선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는 작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낡은 구두 한 짝이 들려 있었다. 뒤축은 한쪽으로 기울었고 밑창 가장자리에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벌어진 부분을 눌러보았다. 가죽이 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손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구두를 뒤집어 뒤축을 살피고 도구를 골랐다. 바늘에 실을 꿰어 가죽을 꿰매고, 벌어진 밑창을 붙였다. 힘을 너무 주면 가죽이 상했고, 서두르면 바느질이 어긋났다.

그는 몇 번이고 손을 멈춰 상태를 확인했다.

작업대 위에는 아직 손보지 못한 구두들이 놓여 있었다. 햇빛이 창밖으로 옮겨 가는 동안 그는 한 짝씩 수선을 마쳤다.

고친 구두를 들어 밑창을 눌러보고, 뒤축을 바닥에 가볍게 대 보았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틈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이번에는 가죽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구두를 선반에 올려놓았다.

작업대에는 내일 손볼 구두가 남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가죽 조각을 모으고 도구를 제자리에 놓았다. 해가 기울 무렵, 잠시 의자에 앉아 손을 폈다 쥐었다.

그날에는 대단한 일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지도,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도 않았다. 다만 손에 잡힌 일을 하나씩 끝냈다. 내일 할 일이 남아 있어도 오늘의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 하루가 끝났다.

남자는 다시 가게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게 주인은 종이를 정리했다.

“빌린 하루는 손님의 과거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하루를 경험한 것뿐이지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업대와 손의 감촉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겪어 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게를 나와 골목을 걷던 그는 맞은편 수선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려 있었다.

사장은 작업대에 앉아 구두를 고치고 있었다. 한 손으로 구두를 받치고, 다른 손의 엄지로 밑창을 눌러 틈을 살폈다. 뒤축을 바닥에 대 보고 바늘에 실을 꿰었다.

남자는 문 앞에 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동작이었다.

“사장님.”

“왔어? 구두 찾으러 왔나?”

사장은 선반에서 갈색 구두를 꺼냈다.

“다 됐네. 한번 봐.”

남자는 구두를 받아 들었다. 밑창을 눌러보았다. 벌어졌던 틈은 단단히 붙어 있었고, 기울었던 뒤축도 가지런했다.

“잘 고쳐졌네요.”

“그럼. 괜히 맡겼겠어?”

사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남자는 구두를 내려놓고 사장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는 잔주름이 있었고 손톱 아래에는 검은 때가 남아 있었다.

빌린 하루의 주인이 이 사람이었다.

그날의 손과 기억이 눈앞의 사장과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남자의 과거가 아니었다. 그는 사장이 살아온 하루를 잠시 경험했을 뿐이었다.

“사장님은 매일 이렇게 구두를 고치세요?”

“그럼. 구두 수선집에서 구두를 고치지, 뭘 하겠어?”

사장은 구두를 가리켰다.

“이건 뒤축이 많이 닳았더라고. 오래 신었나 봐.”

남자는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이 구두를 신고 어디를 다녔는지, 언제 뒤축이 닳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흔적을 만든 시간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사장님은 지루하지 않으세요?”

“뭐가?”

“매일 비슷한 일을 하는 거요.”

사장은 구두 한 짝을 집어 들었다.

“비슷하다고 똑같은 건 아니지. 낡은 데도 다르고, 고치는 방법도 다르고.”

“그렇군요.”

“오늘 할 일을 해 놓으면 내일은 내일 할 일이 있는 거고.”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다시 구두를 고쳤다.

남자는 아버지의 구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발장에 넣으려다 밑창을 한 번 더 눌러보았다.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그는 구두를 가지런히 놓고 문을 닫았다.

아버지와의 저녁은 기억나지 않았다. 구두를 맡기던 날의 마음도 선명하지 않았다. 다만 버리지 않고 수선집에 맡겼고, 구두는 고쳐져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노트북을 열었다.

끝내지 못한 이야기 하나를 골랐다. 늘 마지막 문장 앞에서 멈췄던 이야기였다.

그는 인물이 더는 기다리지 않도록 했다. 기다림이 끝나도 삶은 계속될 수 있었다. 인물은 문을 닫고 남은 밥을 먹었다. 다음 날 입을 옷을 의자에 걸어 두었다.

남자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아침이 되자 그는 어제 벗어 둔 옷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문장을 몇 번 읽고 파일을 저장했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썼다.

며칠 뒤, 완성한 원고를 출력해 수선집으로 가져갔다. 사장은 작업대 옆에 종이를 놓고 읽었다. 중간에 구두를 고치다 가도 다시 원고를 펼쳤다.

마지막 장을 읽은 사장은 종이를 가지런히 모았다.

“끝났네.”

“네.”

“그럼 이제 다음 걸 쓰면 되겠구먼.”

남자는 웃었다.

“다음 이야기는 아직 모르겠어요.”

“모르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

사장은 원고를 돌려주고 다시 구두를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하루를 빌려주는 가게를 떠올렸다.

맡긴 하루를 되찾으려면 빌린 하루를 돌려주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다른 하루를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그 기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아직 결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하루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위해 또 다른 하루를 영원히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당분간 그곳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남자는 수첩을 펼쳤다.

다 쓰면 읽어 주기.

메모는 그대로였다. 그 약속을 나누었던 저녁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는 글씨를 지우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도서관에서 바카라 한 권을 골랐다. 창가에서 두 번째 바카라상에 앉아 첫 장을 펼쳤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왔지만 종잇조각만 끼워 두었다.

그는 바카라을 계속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저녁이 되어 수선집 앞을 지나자 사장이 문을 닫고 있었다.

“이제 퇴근하세요?”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내일도 나오시겠네요.”

“그럼. 고칠 구두가 남았는데.”

사장은 웃으며 문을 잠갔다.

남자는 골목을 걸어 나왔다. 내일도 수선집에는 고칠 구두가 남아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하루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일은 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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