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미뤄둔 나를 읽다

by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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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유고집을 다 읽고

한수산의 에세이를 펼쳤다.

그 전에는 장영희를, 김점선을 읽었다.


철학과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탐닉하던 내가

20년도 더 된,

당시 탐닉했던 바카라들을

요즘 들어 자꾸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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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 담긴 익숙한 단어들이

오늘도 가슴을 울리며 등장했다.

제임스골에이, 플룻, 장미.

순간, 또 가슴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LP위에 바늘을 살포시 올렸던 그 때의 심정으로

유투브로 파헬벨 캐논(주)을 클릭하여

이삼십년 전의 나에게

나를 잠시 머물게 했다.


플룻에 빠져서 당시 함께 일하던 동료의 추천으로

아마추어 관악단에 입단해 교도소로 위문공연을 다녔던 기억,

취재를 위해 남자복장을 하고 화*동의 빨간거리를 드나들었던 기억들이

유독 선명하다.


국회도 드나들고

기업의 수장들과도 만났지만

파헬벨의 캐논을 타고 흐르는 내 기억의 수면에는

교도소와 사창가에서 만난 표정들이 더 섬세하다.


이상하게

가장 인간을 크게 느끼게 한 자리는

가장 아래라고 불리는 자리였다.


내가 만나던 사람들보다

아주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본

그 눈빛들.

그 눈빛에 담긴 삶들.


최인호와 한수산, 장영희와 김점선 등.

당시 나는 그들의 글에서

인간의 삶을 읽었었다.


그렇게

그들의 글 속에서 나도

나의 길을 찾아 울었던 시기가 진하게 있었는데


이십여년.

나는 남들 가는 길대로 살아왔다.

누가 봐도

인정받을만한 삶.


모든 선택이 내 선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선택을 위해 주어진 선택지가

내면이 아닌 외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나의 선택은

타인의 시선이 기준이었음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인정받아 마땅한 길 위에 두 발을 놓고

그 언저리에서만 남들보다 영민하다고 할만큼

바쁘게 걸어다녔던 사람.

그 사람이

나였다.


과거의 바카라들을 왜 바카라장에서 바카라상으로 소환됐을까.

이들 곁으로 다시 본능적으로 돌아가는 나,

왜일까?


앞으로 가기 위해 살아왔지만

어쩌면 다시 나의 결을 찾아 이으라는,

가슴에 박힌 표정에서 울었던

그 자리로 돌아가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매일 새로운 나를 만나지만

그 새로움은

처음이 아니라

오래 미뤄두어 잊혀졌던 나인지도 모르겠다.


캐논이 끝나고

엘비라마디간이 들린다.


이제 때가 되었나.

캐논이 날 벗기고

엘비라마디간이 날 자극하고

한수산이 날 자꾸 들추는 새벽.


내가 최근 펼친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뤄둔 나였다.


더 정확히는,

오래전에 이미 만난 나였는데

그냥 지나쳐 버려 내 안에 박혀 있는

당시의 나였다.

-2026. 05.06.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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