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비우고 싶어진다.
오늘 문득 핸드폰 갤러리의 사진첩에 사진들이 너무 많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게감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삶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손쉬워진 만큼 너무 많은 순간들이 데이터로 남는다.
가볍게 살고 싶지만 물건들을 사는 것은 너무 쉽고, 버리는 것은 엄청난 갈등과 결단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사하며 한참 비워낸 자리는 일 년도 되지 않아 다시 채워지곤 한다.
사진과 같은 추억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필름 카메라를 쓸 때는 낭만이 있었다. 소풍이나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에는 사진관에 들렀었다. 동그랗게 말려있는 32방(?) 짜리 코닥필름을 사서 카메라와 함께 빌려 같이 찍고 싶은 사람이나 꼭 찍고 싶은 순간들을 신중하게 남기곤 했었다. 사진을 찾으러 가는 날엔 내 모습이 어떻게 나올까 기대하며 인화되어 나온 사진을 보고, 잘 나온 사진들은 기다란 필름이 들어있는 비닐을 빛에 비춰보며 그 사진의 필름을 찾아 비닐 위에 색연필로 숫자를 적어 추가 인화를 주문하곤 했었다. 그게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디카(디지털카메라)가 나왔을 때는 문명의 신세계였다. 맘껏 찍었다가 필요 없는 사진은 쉽게 지우는 것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며칠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었던가? 이젠 그 디카마저도 유물이 되었다. 이젠 우리 손안에 작지만 막강한 컴퓨터가 들려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들은 그 작은 스마트폰에 고스란히 담긴다. 머지않아 그 스마트폰이 우리 몸에 장착되어 하나의 장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까맣게 잊고 사진첩의 앨범들을 돌아다니며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갤러리의 여러 앨범들을 찾아다니며 추억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나의 지난 시간들 속에는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여러 행사, 각종 연수, 봄꽃 여행, 가을 단풍 여행 등 소중한 순간엔 그녀가 있었다.
늘 환한 얼굴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명랑하고, 똑똑하고, 에너지 넘치던 윤선생
윤선생과 있으면 재밌는 아이디어가 막 샘솟았다.
윤선생과 있으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막 하고 싶어졌다.
윤선생과 있으면 재밌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이든 잘 먹었다.
접시에 남은 마지막 소스 한 방울까지 빵 조각으로 깨끗이 닦아 먹으며 환하게 웃던 사람이었다.
나보다 8살이나 어렸던 윤선생은 특유의 하이톤으로 언니 언니~ 하며 나를 많이 따랐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우리는 많은 연수에 참여하며 배우는 것을 즐겼고
여러 과학 행사를 다니며 신나게 일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 현장에 필요한 다양한 생물 학습자료를 함께 개발하고,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종이 DNA 이중나선구조 만들기, 우리 몸속 이해하기, 사람 눈의 구조, 종이 개구리 해부, DNA지문을 활용하여 범인을 찾아라! 등등)
서로의 학교에서 힘든 업무를 맡아 서로 도와가며 의쌰의쌰 해내었고
살면서 만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서로 의논했었다.
어느 해 여름 방학 전자현미경 활용 연수였던가? 어떤 연수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어른이 되어서도 범생이 기질이 남아 있던 나는 강사와 눈을 맞추고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늘 앞자리에 앉는 편이었다.
하지만 연수 첫날 뒷자리 쪽에서 들리는 하이톤의 시끄러운 어떤 선생이 매우 거슬렸다. 그런데 다른 연수에서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와 자주 만났고 급기야는 내가 신청했던 6개월 특별 연수를 함께 하게 되었다. 우리는 6개월 동안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깔깔거렸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우린 의외로 코드가 잘 맞았다. 내가 낯선 서울에서 온라인 게임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잘 지낸 데에는 윤선생의 덕이 매우 컸다.
그러던 그녀가 아팠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학을 하여 그녀가 출근했을 때 만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뱃살이 쪘나고 농담처럼 인사를 건냈단다. 그 먹성 좋던 그녀의 소화력이 떨어진 것도 그즈음의 변화였다.
이미 그녀의 뱃속에는 암세포들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 내 몸속에 암세포들이 포자처럼 퍼져 있대."
배에서 시작된 암세포들은 급속하게 온몸으로 퍼졌다. 그녀의 암투병은 3년 정도였을까? 그래도 항암치료로 완전히 빠져버린 머리에 여름엔 예쁜 면 두건을, 겨울엔 하얀 양털 모자를 뒤집어쓰고 우린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 고통이 지나간 후에 함께 웃으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소장 바깥에서 자라며 커지는 암덩어리들이 소장을 막아 더 이상 좋아하던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암은 무서운 속도로 건강했던 그녀의 몸을 점령했고 더 이상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윤선생의 그 밝은 웃음을 우린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코로나의 터널 끝, 뜨거웠던 8월의 여름날, 그녀는 우리 곁을 조용히 떠났다.
내 눈길이 멈춘 사진 속에는 상해의 어느 거리에서인가 노란색 니트를 입은 그녀가 내 팔짱을 끼고 밝게 웃고 있다. 우리가 상해 한국인 학교 초청 과학행사를 하러 갔을 때의 모습이다. 언젠가 카톡 단톡방을 찾다가 윤선생이 함께 있던 단톡방을 본 적이 있다. 아직 지우지 못한 단톡방에 이제 그녀의 이름 대신 `기억할 친구가 되어 단톡방을 나갔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데이터를 비우기 위해 열어본 사진첩에서, 나는 비우지 못할 영원한 그리움 하나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몹시 그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