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지 않은

by운촌





내 또래의 사람들은 보통 형제자매가 네다섯은 된다. 우리 집도 육 남매다. 물론 아들을 하나 더 낳으려고 엄마가 무리하신 면도 있다. 2년 터울로 여섯 자식을 품고 길러내며, 엄마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수많은 계절을 임신과 출산, 그리고 수유라는 거대한 생명의 무게에 기꺼이 내어주셨던 것이다. 수유를 마쳤다고 육아가 끝났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계산해 보면 임신 6년, 수유 6년, 도합 12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오롯이 생명을 빚어내는 일에 묶여 지내신 셈이다. 육체적으로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위험과 희생이 따르는 일이다.


자연의 세계에서 암컷이 치르는 생명의 대가는 눈물겹도록 무겁다. 수많은 수컷들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경쟁할 때, 암컷은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하며 신중하게 생명을 품는다. 인간만이 문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부일처제와 제도의 보호를 받지만, 가난과 의료 혜택의 사각지대에서 어미들이 겪어야 했던 실존적 무게는 상상 이상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래서 사람을 비롯하여 암컷들은 임신에 매우 신중하다. 가장 우수하고 좋은 유전자를 가진 정자와 수정을 해야 한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에너지를 엄청나게 치러야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니 암컷은 배우자를 고를 때 많은 것을 따져야 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연의 세계에서 수컷 동물들 중 짝짓기 기회를 갖는 비율은 5%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 나머지 95%의 수컷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짝짓기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수컷과의 경쟁에서 지거나 암컷의 선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5%의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들이 여러 암컷들과 짝짓기에 성공하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종족 유지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인간으로 태어난 덕에 일부일처제라는 슬롯적 제도와 도덕적 규범 속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한 명의 여성과 짝을 이루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하나?)


친정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궁금하여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 육 남매를 낳아 키우다가 잃은 아픈 손가락은 없었어요?"

"왜 우리 남매는 모두 두 살 터울인데 나랑 언니만 세 살 터울이에요?

혹시 언니랑 나 사이에 다른 아기가 있었어요?"


"엄마는 진짜 복이 많았서인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언니는 십일월에 낳아서 너랑 3년 터울이 된 거고, 너희들은 그 흔한 생손 앓이 한번 안 하고 똑 고르게 자랐지. 동네에 홍역이 돌아서 너랑 언니 둘이 심하게 앓고 일어난 것 빼고는 엄마는 진짜 그런 일 없었어.

동네엔 종종 있었지, 우리 뒷집 진형이 엄마도 어린 아들 진형이를 잃었어. 네 오빠가 태어났을 때, 외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좋은 이름을 세 개 지어 보내주셨는데, 그 중 진형이라는 이름이 제일 좋다고 하셨고 엄마도그 이름이 맘에 들었었어. 그렇지만 그 집 엄마가 진형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죽은 아이 생각에 얼마나 맘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진형이 대신 진옥이라는 이름을 골랐지."

하시며 우리 뒷집에 살던 진형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열이 펄펄 끓는 아기를 업고 먼 길을 내달리던 어미들.

자신의 등 위에서 그 가여운 아기를 보내야 했던 여인들.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속수무바카라으로 아이의 손을 놓아야 했던 그 막막함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피임 지식이나 피임 약도 없었던 시절, 임신기간 280일 동안엔 배란이 되지 않았고, 어미가 수유를 하는 기간에는 배란이 억제되니 대부분의 여성들은 2년 터울로 아이를 임신하고 낳아 키우며 대부분의 청춘을 보냈다.

나도 두 아이를 낳아 키워 보았으니 임신과 출산이 엄청난 부담이라는 것을 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시각에서 그 시절을 돌아보면, 어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단순히 가난해서 견뎌낸 시련을 넘어선다. 그것은 여성의 신체가 온전히 슬롯적 제도나 의료적 안전망 없이 자연의 폭력과 가부장적 환경에 방치되었던 구조적 아픔이었다.


흔히 세탁기와 전기밥솥 같은 가전제품의 보급이 여성들을 갇혀있던 잡안에서 해방시켜 슬롯 진출의 문을 열었다고 말한다. 물론 가사 노동의 무게를 덜어준 기술의 발전은 지대했다. 하지만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해방과 자유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생명, 그리고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 바로 피임이라는 자기 결정권이 주어지면서 비로소 싹트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생명의 잉태와 상실이, 이제는 주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사후 피임약의 일반 의약품 허용에 관한 이슈를 보도한 적이 있다. 뉴스에서 보도한 사후 피임약은 노래보와 같은 것으로 합성 황체호르몬을 고용량으로 투여하여 배란을 지연하거나 억제하여 임신을 막는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 안에 복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예전에는 사후 피임약의 원리는 자궁벽을 변화시켜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다고 했었다. 나도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다) 여성의 임신은 여성의 전 일생을 통틀어 엄청나고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이 자신의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롯이 여성의 몸 하나로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탄생과 죽음의 문턱을 돌아보며,

우리는 비로소 그 아픔의 깊이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 안에는,

그 시절 아픈 아이를 안고 무너지던 어미들의 간절한 기도가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 속에 묻힌 수많은 아픔들.


채운도 지인으로부터 지인의 엄마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엄마이기 때문에 공감되는 그 아픔들

채운은 그 가슴 아픈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리 오래지 않은



채운




열 펄펄 끓는 돌배기 들쳐 업은 아낙네

땡볕 아래 신작로 내달리는데

퉁퉁 불어터진 젖무덤 위로

폭포수처럼 땀줄기 내리고 제풀에

지쳤는지 자지러지던 갓난애 울음도 잦아들고

아가, 조금만 아가, 조금만

의사 선상 보도록만 참어 참어라

우리 아기 잠들었나 울다 지쳐 잠들었나

건성건성 다릴 건너 내리막도 한달음에

인적도 없는 팔월 땡볕 아래로

가쁜 숨 몰아쉬며 이 악물고 어미는 담박질 하네

등에 업힌 어린 것 슬그머니

고갤 떨구었나. 뜨끈한 등줄기 땀범벅에

잠잠하네. 울 아기 울다 지쳐 잠든 게지

장터어름 다다라 아낙네 부여잡고 물었다네.

보소, 울 아기 잠들었지유?

울 아기 잠들었지유?

아낙이 혀만 끌끌 차더니

입 굳게 닫고 고갤 가로 젓네.


죽은 아기 들쳐 업고 내달려온 십리 길

늘어뜨린 명줄 뚝 끊어져

딸 부잣집 막둥이 나와 언니는 일곱살 터울

그 사이 잠깐 살다간 사내애 하나 있었다는

그 시절 엄마만큼 나이 먹고 첨 듣는 옛이야기

그날도 그랬을까?

팔월 한낮 매미의 떼울음

곡소리로 끓어 넘치는데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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