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느낌이 안 좋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성의 명령을 가볍게 무시하고 저지른 소소한 일탈들이 하나씩 벌로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 말라고, 참으라고 나의 뇌가 명령을 내리지만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첫째는 오후의 커피다.
나는 카페인 분해 능력이 제로다. 실제로 몇 년 전 유전자 검사로 확인해 본 적이 있다. 카페인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가 없다. 그러므로 오후엔 절대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 그걸 못 참고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그 결과는 뻔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밤을 꼴딱 지새우는 억울한 밤의 고통이 벌로 따라온다.
둘째는 저녁의 맥주다.
아침에 해가 뜨면 카페인이 당기고 저녁에 해가 지면 맥주 한 잔이 강렬하게 당긴다. 절대 많이는 마시지도 못하고 안 마신다. 하루에 딱 한 캔! 쌉싸름한 홉향이 진한 에일 맥주 한잔의 유혹은 정말 끊기 힘든 중독이다. 맵고 짠 것도 멀리하고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음식도 안 먹는 건강식주의자인데, 얼마전 건강검진 위내시경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70대 노인의 위 상태란다. 세계맥주 하루 한 캔의 낙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여 나는 냉장고 속에 온갖 종류의 세계맥주를 채워 놓고 오늘은 뭐를 마실까 하고 고르는 행복한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단단한 아몬드같은 견과류를 깨물어 먹는 습관이다.
딱딱한 얼음이나 견과류 등을 먹을 때 치아에 크랙이 생기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진짜 억울하다. 뭐 대단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직 임플란트를 하나도 하지 않을 만큼 나름 치아관리를 잘해 왔는데, 몇 년 전에 이가 시리고 아파 치과에 갔더니 어금니에 크랙이 나 있으므로 잘못하면 치아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요즘 나의 아침식사는 찐 단호박 한 조각 위에 그릭 요거트와 견과류를 함께 올려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다. 먹을 때마다 견과류를 으깨 넣어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그 와드득하며 씹히는 느낌이 좋아서 그냥 먹어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사고를 쳤다. 혀끝에 느껴지는 오른쪽 뒤어금니의 깨진 부위가 기분 나쁘다. 치과에 가야 한다. 하지만 정말 가기 싫다. 어린아이처럼 혼자 고집을 피우며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를 미루었다. 모든 병원 치료는 불편하고 아프고 싫지만 그중 치과 치료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안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아직 임플란트를 할 단계는 아니니 이전에 충치 치료한 거 떼내고 크라운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뜯고 파내고 신경치료하고 채우고 돌려 깎은 후 덮어씌우는 크라운 치료를 하자고 한다. 치과 치료는 무슨 큰 공사 같다. 치과에서 들리는 드릴 소리마저도 그렇다.
우울한 마음으로 돌아와 통화한 친정엄마는 더 기가 막힌 소식을 전한다. 90이 넘은 엄마가 옥수수를 드시려다 부실해진 앞니 세 개가 우수수 부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이 큰 돈을 들여 임플란트를 해야 하겠느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90대 노모의 서글픈 넋두리는 끝이 없었다.
잉여의 시간!!!
대부분의 포유류는 번식이 끝나면 급속도로 노화가 진행되고 죽는다. 그것이 생명의 본래 지정된 시나리오다. 하지만 인간은 유독 번식이 끝난 뒤에도 30년, 또 30년을 더 산다.
진화생물학의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에 따르면, 폐경 이후에도 살아남은 할머니들이 손주를 돌보고, 생존 기술을 전수하고, 육아를 도우며 인류가 문명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동물은 번식 능력이 떨어지면 오래 살아남는 것이 진화적으로 큰 이점이 없다. 그런데, 인간 여성은 폐경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 손주를 돌보고,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을 돕고, 여러 지식을 전하고, 위험을 피하는 법을 알려주고, 딸이나 며느리의 출산과 육아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도움 때문에 아이들이 더 잘 살아남고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또한 할머니처럼 오래 산 성인들이 지식과 경험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면서 인간 슬롯에서는 지식과 문명이 축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식물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물과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 위험한 동물은 어떻게 피하는지...... 이런 지식이 이어질 수 있던 것은 당연히 인류의 생존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0개의 젖니로 살다가 28~32개의 영구치로 평생을 버티게 만들어졌는데, 관리를 잘해도 60~70대가 되면 임플란트라는 ‘세 번째 치아’를 얻는다. 심지어 이제는 그 임플란트마저 교체해야 할 때까지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 축복인가?
잉여의 시간 덕분에 우리는 지구 생태계의 주인이 되었다. 축복이라기엔 치과 드릴 소리가 너무 무섭다.
오늘도 욱신거리는 어금니를 감싸쥐며, 이 길고긴 잉여의 세월 속에서 건강하고 품위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