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년 무렵, 다뉴브 강가 진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황제는 촛불 아래 펜을 들었다.
로마의 주인이라 불렸으나
그의 밤은 천막 한 칸이었고
그의 벗은 차가운 강바람이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글이 아니었다.
제목도 없이 적어 내려간 것을
훗날 사람들은 '나에게'라 불렀다.
첫 장에는 감사가 줄지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온화함, 어머니의 경건함
스승들이 일러 준 견딤과 겸손
그리고 어느 밤, 한 줄을 적었다.
운명이 네게 데려다준 사람들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라.
운명(運命)이라는 말을 가만히 굴려 본다.
運은 옮긴다는 글자
수레에 실어 나른다는 뜻
그러니 네 곁의 사람은
우연히 떨어진 낙엽이 아니라
운이 수레에 싣고 와 네 앞에 내려놓은 얼굴
고르지 않았으나 닿았고
구하지 않았으나 앉았다.
그 자리에, 하필 그 사람이 있었다.
'온 마음'이라는 말
반쯤의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셈이어서
남겨 둔 몫만큼 사람이 멀어지는 법
수레가 내려놓은 이들이
이름을 부르면 저녁이 따뜻해지는
다 알지 못한 채 곁이 되어 준 사람들
그들을 두고
더 나은 사람, 다른 사람을 기웃거렸고
곁에 있는 얼굴을 자꾸 곁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온 마음이란
고쳐 쓰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 팔에 안아 드는 일
당신은 묻는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하느냐.
대답 대신
수레가 멈춘 자리에
등불 하나를 걸어 둔다.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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