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베이글

by은파랑

1610년
폴란드 옛 도시 크라쿠프

그곳 유대인 공동체 규약에는
작은 조항 하나가 적혀 있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둥근 빵을 선물로 건넨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고리 모양 빵이었다.

사람들은 그 빵을
고리, 혹은 팔찌를 뜻하는 말로

베이글이라
불렀다.

도시 장터에는
오래전부터

반죽을 물에 삶은 뒤 구워내는
둥근 빵이 팔리고 있었다.

먼저 삶고
다음에 굽는다.

그렇게 만든 단단한 껍질은
속의 촉촉함을 오래 지켜주었고

가운데 구멍에 끈을 꿰면
멀리까지 들고 다닐 수 있었다.

19세기가 저물 무렵
동유럽 유대인들이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뉴욕 맨해튼의 남동쪽
로어 이스트 사이드 비좁은 골목에 짐을 풀었다.

1900년 무렵
그 동네에만 일흔 곳의 빵집이 있었다.

해가 뜨기 전
건물 지하 좁은 빵집에서는

반죽 삶는 냄새가
골목으로 먼저 흘러나왔다.

1907년
삼백 명의 베이글 제빵사들이

자신들만의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비법은
조합원 아들에게만 전해졌다.

다른 누구도
제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도
이 도시 베이글은

지하실 손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냈다.

단단한 밀가루에
물과 소금과 이스트

보리 엿기름을 조금 풀어
단단하고 뻑뻑한 반죽을 치댄다.

손바닥으로 길게 밀어
양 끝을 겹쳐 둥근 고리를 만든다.

차가운 곳에서
하룻밤을 천천히 재운다.

새벽
커다란 솥의 물이 펄펄 끓으면

고리를 하나씩 떨어뜨린다.

가라앉았던 반죽이
잠시 뒤 둥실 떠오른다.

한 번 뒤집어
다시 잠시 삶는다.

건져낸 반죽 위에
참깨와 양귀비 씨를 흩뿌리고

뜨거운 오븐에 넣으면
겉은 반들반들 윤이 나게 구워진다.

1958년
한 사내가 베이글을 빚는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굴리던 고리를
한 시간에 수백 개씩 찍어내는 기계

얼린 베이글이
미리 반으로 갈라진 채

트럭에 실려
이 나라 곳곳 가게로 퍼져 나갔다.

그래도 뉴요커들은
이 도시 베이글이 가장 맛있다고 믿는다.

부드러운 이 도시의 물이
맛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물이 아니라
손 솜씨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막 구워낸 베이글을
반으로 가른다.

살짝 구워
하얀 크림치즈를 두툼하게 바른다.

위에
얇게 저민 주홍빛 훈제 연어를 겹겹이 얹고

붉은 양파 몇 가닥
케이퍼 몇 알

토마토 한 조각을 올려
다시 반쪽으로 덮는다.

두 손으로 쥐고
크게 한 입 베어 물면

반질반질한 껍질이
사이에서 한 번 버틴다.

저항을 넘어서면
속은 촘촘하고 쫄깃하게

씹을수록
고소한 밀의 맛을 내놓는다.

크림치즈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를 감싸고

연어의 짭조름하고 기름진 맛이
위로 겹쳐진다.

붉은 양파는 알싸하게
케이퍼는 새콤하게

한 입 안에서
맛의 층이 차례로 열린다.

아침의 바쁜 거리에서
종이봉투를 든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뉴욕 베이글 하나에는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건네던
옛 도시의 축복과

해뜨기 전 지하 빵집에서
반죽을 삶던 이민자들의 땀과

아들에게만 물려주던
고집스러운 손의 비법이

쫄깃하게, 둥글게
함께 구워져 있다.

가운데가 비어 있어
오히려 온전한

고리 하나에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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