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이 말을 천천히 입안에서 굴려보면
조심이 빠져나간 소리가 난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무게를 재어보지 않고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앉을지 살피지 않은 채
툭, 던져지는 것
함부로 한 말은 가볍게 떠나가지만
받은 사람의 가슴에는
오래도록 앉아 있다.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상대를 나보다 한 칸 아래에 두고
바라보는 일이다.
1785년, 철학자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 이렇게 적었다.
값이 있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있지만
존엄이 있는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누군가의 쓰임이 되기 전에
자체로 귀한 존재
그러니 나를 함부로 대하는 손은
내게 값을 매겨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값으로 불릴 수 없는 사람이다.
멀어진다는 것은
싸움이 아니다.
문을 쾅 닫는 일이 아니라
문고리를 조용히 한 칸 돌려두는 일이다.
대답은 짧아지고
설명은 줄어들고
마음은 한 걸음 안쪽에 머문다.
변명하지 않고
증명하지 않고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인사는 건네되
속마음은 건네지 않는다.
웃음은 남기되
기대는 거둔다.
겨울나무는
잎을 거둔다고 해서
숲을 떠나지 않는다.
차가운 계절을 건너는 동안
제 안의 물기를 지키는 것이다.
멀어지는 일도 그와 같다.
누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마르지 않게 하려는 일이다.
처음에는 미안함이 먼저 올 것이다.
내가 너무 매정한 것은 아닌지
문 앞에서 오래 서성이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기억하자.
조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례가 아니라
나를 향한 예의라는 것
그리고 오늘부터는
나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기로 한다.
피곤한 몸에게 짧은 안부를 건네고
서운한 마음에게 이름을 불러주며
나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연습을 한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머무는 곳에서
비로소 숨을 편히 쉰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간다.
나를 귀하게 대하는 사람 곁으로,
나를 값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 곁으로
은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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