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앞에서 손이 딱 멈춰 서는 순간이 있다. 형태는 제법 자리를 잡았고, 색도 그럴듯하게 얹혔는데, 이상하게 어딘가 허전해지는 그런 순간.
그럴 때 사람의 손은 신기하리만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조금 더 복잡한 패턴을 그려 넣거나, 짙은 색을 한 겹 더 얹거나, 슬그머니 쓸데없는 사물 하나를 더 슬쩍 배치하는 쪽으로. 나는 오랫동안 그 손짓의 이름을 ‘장식’이라 불렀고, 오랫동안 미워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회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형태와 색이 그저 스스로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스쳐 지나가는 빛의 방향이나, 인물의 기다란 침묵, 혹은 시간에 닳아버린 흔적 같은 것—를 증언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 손은 자주 증언보다는 장식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런데, 과연 장식성과 회화성이 그렇게 칼로 두부 모서리 베듯 편을 가를 수 있는 문제일까.
돌아보면 장식과 회화를 가르는 기준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쓰인 재료나 화려함의 정도가 아니라, 그 형태와 색이 그림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을 수행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장식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패턴은 자신의 정교함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있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반면 회화는 다른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 형태와 색이라는 도구를 빌려 쓸 뿐이다. 아름다움이 따라오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사한 결과일 뿐 애초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니 똑같은 붓질이라도 사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벽지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줄무늬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지만, 그 줄무늬 사이로 비껴드는 빛이 하루 중 가장 쓸쓸한 특정한 시각을 증언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순식간에 회화가 된다. 형태는 완벽히 동일한데, 그것이 무엇과 끈을 대고 있느냐에 따라 이름표가 바뀌는 것이다.
미술사라는 거대한 기록 역시 이 엄연한 사실을 몇 번이고 증명해 왔다. 앙리 마티스는 평생 '장식적'이라는 비아냥을 달고 살았지만, 그의 강렬한 색과 패턴은 인간의 깊은 정서와 공간을 구축하는 정교한 도구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려한 금박은 공예의 언어에서 빚어졌으나, 그가 말하려 한 것은 인물의 지독한 관능과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뛰어난 화가들은 늘 이 위험천만한 경계선을 유유히 넘나들었지, 어느 한쪽에 안주하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수첩 모퉁이에 이렇게 적어둔 적이 있다. ‘맥락이 사라질 때, 그림은 장식으로 간다.’
그때는 그 생각을 놓치기 싫어 적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맥락을 놓쳐버린 화가의 비겁한 도피처가 곧 장식이며, 그 맥락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건 아주 서늘하고 적확한 관찰 기록이었다.
맥락이 사라진다는 건, 지금 이 장면에서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확신이 흐려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손이 자꾸 화려한 쪽으로 쏠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제 그것이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아주 정직한 신호라고 믿는다. 그림의 어떤 구석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워두기보다 채우는 쪽을 택한다. 무언가를 비워내는 일은 지독한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가장 조심스럽게, 붓을 아껴가며 그린 곳은 늘 인물의 얼굴과 손, 그리고 시선이 머무는 자리였다. 그곳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이미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반면 배경이나 덤으로 들어가는 사물처럼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아득해지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화려함이라는 녀석이 슬그머니 빈틈을 타고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장식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무르익지 않은 확신의 위치를 가리켜주는 정직한 지도 같은 셈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예쁘게 그리려는 욕망 자체를 굳이 숙적으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다. 한편 그 마음은 오히려 나를 캔버스 앞에 계속 앉아 있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예쁨'이 목적의 왕좌를 차지하는 순간이다. 즉, "이것이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이 "이것이 진짜인가?"라는 질문보다 앞서 달려 나갈 때.
아마도 내가 오래도록 찾아 헤맨 경계선은 이 질문의 순서를 바로잡는 데 있을 것이다. 먼저 내가 이 장면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그다음에 그 말을 가장 정확하게 옮겨 적을 형태를 찾아내는 것. '예쁨'은 그 깐깐한 정확함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부산물로 남겨두는 것.
물론 이 순서가 하루아침에 뒤집힐 리는 없다. 손끝이 다시 화려한 눈속임 쪽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마다, 나는 붓을 거두고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부분이 단순히 예뻐서 만족스러운가, 아니면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어 만족스러운가.
이 질문을 얼마나 더 되풀이해야 손이 먼저 그 답을 알아차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그 아프게 반복되는 물음 자체가 이미 회화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장식과 회화는 결코 서로 등을 돌린 타인이 아니라, 같은 손 안에서 매 순간 새롭게 방향을 찾는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