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옭아매는 '객관'의 함정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1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이 몸뚱어리의 발악이다. 창작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 여기서 1은 그런 의미다. 왜 숫자에 빗대는지 모르겠는데. 즉시 떠오르는, 대입할 만한 기호가 이놈일 뿐이다. 수학에서 미지수를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느낌. 엑스 와이 제트 같은 얘들 말이다.
그래서 왜 정지하고 있냐. 무섭거든. 무엇이 필자의 눈을 동태로 만들까. 창작물에 관한 평론. 뭐 그것도 있겠다. 아니 이게 맞다. 다만 채점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우리는, 아니 나부터 짚어야겠다. 넘어가기는 다음 문제. 판가름은 본인 이외의 사람이 하지 않는다. 즉 내가 나를 그러할 수 있다. 평가라는 행동이 난 그래서 무섭다.
수준을 따지는 데에 자격이 있을까. 너가 뭔데. 암암리에 이런 풍조가 만연한 현실은 차치하고. 독일제 자동차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걷기 애호가. 눈썹에 추호도 관심 없는데 연애를 갈망하는 선천적 독신. 운동 좀 하라고 핀잔하는 등산 후 음주 애호가. 어느 처지 어느 성향일지언정, 말은 하지 않는가. 내 소유의 그것이. 지폐로 환산할 만큼의 가치가 형성되는 경우.
굳이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표현은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을 가지든. 풀어서 말하면 평가 대상에 관한 이해도는 무관하다. 여기도 참 할 말 많이 떠오르는데 일단 누르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나 자신이다.
보통 이런 식상한 대답이 나오겠지. 나는 내가 제일 깊게 알고 있어. 이 문장, 담보 가능한가. 과연 자신에 대한 파악을 가장 잘하는 이가 자신일까. 사실 여부를 떠나, 이것을 성찰한 사람이 얼마만큼 되는지. 필자는 본인에 대한 이해도를 자부하지 못하겠다. 객관성이 떠오르는데. 나라고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자부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니. 여기에 사로잡혀 오용을 저지르기도 한다. 범할 만한 오류는 두 가지로 나눈다. 애써 낙천적으로 본인의 두뇌를 세뇌하거나. 다비드상을 꿈꾸며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후자는 이유가 하나로 모인다. 객관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머리가 물들어져 버린 탓이다.
상충 관계.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기. 자존감 객관성이 들어맞는다. 그래. 수학적으로 반비례한다는 의미지. 내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낙천적으로 한다. 이러면 자존감은 보존되지. 단어를 들여다보자. ‘낙천’이라는 글자에 감정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이러니 객관성은 자연스레 후퇴할 수밖에 없다. 감정은 곧 주관이므로. 고로 반대로 행동하면 객관성이 높아지겠네.
어. 당황스럽다. 염세적으로 거울 바라보는 순간을 회상한다. 자존감이 내려가는데. 거기서 우러나오는 평이 그만큼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다시금 깨달았다. 염세도 결국 감정을 함유하는데. 어찌 망각해 버렸는가. 아니 왜 인지조차 못 했는가. 몇 주 전에 쓸 때는 이런 서사가 아니었는데. 이래서 글은. 두들겨 보지 않고 건너면 망한다. 고치기 전에는 이리 끝을 맺었다.
낙천과 대비되는 잣대가 좋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아니하더라. 이 문장은 예상만큼 우수하지 않은 효용만을 인지했지. 3을 잃으면 3만큼 좋아져야 하는데, 이 소리다. 뭐, 뒷걸음 쳤을지언정 의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염세도 선글라스구나. 둘 다 보존할 방법. 균형을 이루는 5대 5를 찾기야 하겠는가.
있지. 비판이 떠오른다. 어감만 봐서는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비난과 음성 한 끗 차이라 그런지. 필자가 저 글자를 마주할 시, 짐짓 거리감이 다가온다. 들여다보면 참 특징이 다른데. 두 개념의 핵심은 감정에 있다. 비판은 감정을 봉쇄하고 잘잘못을 언급하는 행동. 비난은 감정을 담은 공격. 그것의 유무에 따라 성질도 구분된다. 비판에 감정이 첨가되는 순간 비ㅍㅏ.... 이리 변하고야 만다.
곳곳에서 비판을 빙자한 비난이 두루 보인다. 그런 문장들을 쉽고 다양하게 접하다 보니, 혼동이 세뇌로 진화한다. 그래. 매개체에 따라 같은 말도 각자 다른 감정을 형성한다. 이걸 쓰는 시점에서 비판으로 간주할 문장. 당시에는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희한하게 음성으로 들으면 바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잘못을 지적받을 때. 단지 그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본인의 탓이지.
뜨끔하다. 그릇 용량이 충분하지 않기에. 공교롭게도 요즘 식사량마저 줄어드니. 비판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필요를 체감한다. 눈도 그렇지만 귀는 더욱 마찬가지로. 타인이 제공하는 지적을 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자신을 ‘비판’하려면 거쳐야 하는 초석이다.
자고 일어나면 그릇 가게로 달려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