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

그립고 쩨쩨한 숫자

by엉금

병원에 약 타러 간다. 현재 본인 거주지와 다른 곳. 전용도로 타고 시에서 시로 넘어가야 한다. 30분 정도 지나고 윤곽이 나타나지. 관문 하나가 운전자를 반기면 그게 또렷해진다. 일단 들어왔다는 소리다. 비록 외곽이지만. 잠깐의 아파트 숲을 지나면 산업단지가 보인다.


본인은 그 양옆에 끼어 있는 큰길을 지나고. 도중 수십 자 간격으로 매달린 표지판을 흘긋한다. 날 좀 보시오. 저마다 그들이 타령하는 소리가 보인다. 난 그들을 시장통 호객꾼처럼 대한다. 가끔 친절을 베풀어 몇 초가량 시선을 제공하는 정도로.


오늘이 그 가끔인 모양이다. 아니 더한 날이다. 눈동자가 움직일지언정 멈추진 않았는데. 멈춘다. 익숙한 상호의 왼편. 다른 의미로 익숙한 다른 그것이 붙어 있다. 삼양사. 온전한 이름은 삼양사 휴비스 되시겠다. 그 병원을 수년간 방문했으니. 과장 배제하고 수십 번 지나간 도로인데. 면허 따고 이제야 찾았다니. '놀랄 노'다.


사실 방금 표현은 과장이다. 감정은 뭐 생기지도 않고. 발견 직후 궁상맞은 공상을 한다. 차라리 더 안정적인 기업도 있었으면. 여기가 이렇게나 힘들지 않았을 텐데. 뭐 식료품 업체라든지. 저기 쓰인 삼양도 그렇고. 농심이나 아니면 롯데 해태. 그런 회사들 있지 않나. 읊조리는 도중 떠올린다. 농심을 얘기하던 중에. 뜬금없나 좀. 아무튼 식품 관련 사례를 떠올리다, 컵라면 생각이 난다.


기억하는가. 옛날 컵라면 가격을. 이를테면 농심의 큰사발과 왕뚜껑은 1,050원이었다. 참으로 얄미운 숫자. 그 50원이 모자라서. 커다란 든든한 컵라면 하나 못 사 먹던. 급식으로 배 채우던 시절이 떠오른다. 무슨 의도였는가 그대들이여. 그 단위는 이미 가치를 잃기 시작했는데. 한 닢으로 불량식품조차 먹을 수 없었는데. ‘은행잎’이 등장한 지 수년도 지난 시점이었는데. 그 천분의 일이 그토록 탐났는가.


차라리 오백분의 일이었다면. 이리 괘씸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터. 어쩌면 나만의 불만일지 모른다. ‘엄카’라는 물건을 들고 다니지도 않아서, 내 결제 수단은 현찰뿐이었으니. 동전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고 존재다. 짤주머니 형태가 아닌 지갑에 넣기. 지폐와 같이 넣으면 영 접기 힘들다. 속에서 데굴데굴. 변덕을 부리며 얌전하기를 거부한다. 열이면 아홉. 주머니로 들어갈 운명인데. 접히지 않으면 물건으로서 효용이 존재할까.


내부에 있는 카드꽂이 속에 넣으면 되지 않냐고. 애처롭게도 진작 포화였다. 주민증, 학생증, 도서관 대여증. 이만큼으로 지갑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현 지갑을 열면 저만큼은 콧바람 나온다. 각 꽂이에 적어도 2개씩 겹쳐 넣는데. 직불카드를 시발로 합성수지 덩어리는 우후죽순 불어났다. 고로 이젠 넣고 싶어도 못 넣지.


바지 주머니는 얻다 두었냐고. 또 본인 나름의 핑계가 있다. 예로 구강 탈취제 혹은 자동차 열쇠. 그 좁은 공간에 함께 들어갈 운명인데. 상상해 보자. 탈취제 뚜껑에서 동전 냄새를 풍긴다고. 상쾌함을 가져다줄 도구에서 불쾌함을 받는다니. 이런 식으로 물건 본연의 기능을 퇴색시킨다. 이래서 되나.


조목조목 따지니 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단순히 주관적 심리에서 비롯한 투정이었는데. 급기야 동전은 존재가 민폐. 라는 극단으로 향하기 일보 전이다. 진정해야지. 백 원 지폐의 3공 시절을 회상한다. 들고 다니기 편했겠네. 상상 나래 그리다 이내 접는다. 멍청한 생각이라.


물가를 망각하여 가능했던 짓이다. 지금의 백 원, 그땐 못해도 십 원 이하 가치 아니었을까. 필자가 충분하지 않은 노화를 아쉬워하는 근거다. 존재 이전 과거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 추정 말고 없으니. 그러했었지가 아닌 그러했구나. 선대의 이야기를 통한 공감이 최선이다. 옛날이 살기 좋았지. 이 따위 푸념은 추호도 없다.


그저 당시에만 있어 체감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 부럽다. 시간에 따른 존재의 특수성. 난 언제쯤 누릴 수 있을까. 언젠 나이 먹어서 아쉽다더니. 쓴이는 그렇게 철새가 된다. 늙으면 시간이 줄고. 덜 늙으면 향수가 옅고. 정확히는 욕심쟁이라 치부해야겠다.


앞서 경영자들의 ‘50원 애정’을 깠었지. 속뜻이 담겨 있을까 싶다. 소멸하는 50원의 가치를 되살리고자 미주알고주알. 정말로 이런 명분을 내세우면 웃기겠다. 지금은 1,600원 1,800원 이러니 그런 말도 못 하겠지. 아니면 그들이 부르짖은 가치 보존에 실패했다든지. 음 오히려 체감으로는 완화됐나.


그 불쾌한 심정. 사라지지 않았다. 100원도 주렁주렁 들고 다녀야 뭘 쓰지. 그러나 100에 들어갈 숫자를 50으로 바꾸니. 확연히 나아지긴 했다. 별개로 금액 자체는 그립기도 하다. 사발면이 1,200원에 달하다니. 전에는 한 장 내면 쇳덩이를 얹어 받았는데. “짜장면이 500원이었어”라는 대사가 저런 말맛일까.


사진 속 범벅이 인류 역사상. 최후의 1050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