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의 비애
점차 수그러드는 비. 산 인근에 자리한 ‘물공원’.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갈까. 하다 그를 보고 가기로 한다. 연습도 시킬 겸. 녀석에게 잠시 운전대를 맡긴다. 의외로 탈 없이 도착하나 했는데. 사발면이 주차보다 빨리 익는다. 꼬들면을 놓쳐 임계점을 찍은 나. 도로 운전대를 뺏는다. 마침 앞유리에 들리는 소리가 둔탁해진다. 자연도 그의 몸부림에 싫증 난 모양이지.
예외 없는 문득. 예외 없는 녀석. 예외 없는 심정. 모든 다르지 않다. 계단 역시 평소대로 오른다. 그의 사진을 늘 그러듯 찾아 헤맨다. 맨 앞부터 하나 둘 셋 야. 그렇게 방 열 칸씩 왕복했을까. 야 찾았다. 녀석이 외친다. 그 방 거의 끝으로 들어가면 두 얼굴이 우리를 반긴다. 심드렁하게 휴대전화를 보는. 음영 속에서 환하게 웃는. 그리고 날짜와 이름 적힌 도자기까지.
그의 표정은 볼 때마다 새롭다. 자주 들리지 않은 내 탓이 제일 크지. 처음 본 장소는 초교. 아마 같은 반이 되고서 안면을 텄던 기억이다. 곧 중교로 이어져 심심찮게 보고 지냈다. 그의 얼굴은 거기서 끝. 고교부터 그것이 어땠는지 알 길 없다.
대신 거취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종종 녀석이 보따리를 풀은 덕택에. 그와 어떤 일을 겪었는지. 학원에서 만났다는 둥. 어떻게 싸웠다는 둥. 그때는 시시콜콜하게 들렸다. 청자는 문장 하나로 일축했다. 먼 고교에서 무탈하게 지내는구나. 성인이 되고 볼 핑계 따위 없었다. 동창회.... 는 다소 이르고, 신정 0시 0분 기념. 누구누구 온다고 하는데 너도 와라. 이런 경우 말이다. 제일 커다란 이유는 연락 두절. 그와 끊겼냐고.
녀석과의 그것이다. 미쳐 돌아가던 자신이 모든 주변을 쳐냈다. 재개발이 진행되었나, 하면 또 아니다. 대중성 강한 성격은 아니고. 컴퓨터 게임은 흥미 없고. 타인과의 접점을 만들기. 내게 세상 힘든 작업이었다. 그를 둘째 쳐도 눈길 보낼 ‘누구’가 없었지. 얼굴은커녕 존재 자체를 잊었다. 사람을 만들기 위해 나를 그렇게 바꿔야 한다니. 저렇게 스스로가 묶은 그린벨트에 줄곧 허덕였다.
기대에 없던 23년 4월. 우연히 재건축 기회를 잡게 되었다. 차근차근 아닌 극적으로. 재회한 녀석과 도란도란 여러 가지 나눴다. 그러다 방향지시등 안 켰는데. 급하게 내 귀로 들어왔다. 예상할 틈 1도 없이. 필자는 그의 소식을 전해 받았다.
나이, 사유, 후일담. 모든 내용이 그에게 비참했고 비참하다. 듣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다. 왜 이제야 그것이 생겼는가. 그마저도 이런 성질이어야 했는가. 대화를 일단락하고 우리는 약속했다. 보러 가자고. 이내 지켰다. 지금도 문득, 지켜내고 있다.
걸쇠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첩. 그의 앞에 설 때마다 항상 집는다. 자그마한 종이를 채우기 전, 그동안 적힌 잉크를 차례차례 둘러본다. 처음 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족의 글귀 사이사이, 오른쪽 귀퉁이 편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초중교 동창임을 바로 확신했다. 넘길수록 발자취는 점점 흐려진다. 녀석 나 가족 가족. 녀석 나 가족 가족 가족.... 이 구조를 반복한다.
잊힌다니. 그 사실을 되뇌는 내가 슬픈데. 그는 오죽할까. 한때 생각했던 이로써 고백하면, 감히 그 심정을 기억한다. 탁 트여 있는데 사방이 막힌 정신. 내 필력을 최대로 끌어서 부리는 모순이다. 호전되었어도 잊을 수 없는 감각. 10여 분을 이리 생각했는데 사람 안 변한다. 몇 녀석들로 상상하니 괜히 눈꼬리가 내려간다.
가족의 안부를 넘기면 하얀 종이가 나온다. 이제 내 차례다. 어설픈 인사로 시작한다. 갈 때는 잠잠하다 막상 도착하니 퍼붓는 빗방울. 놀러 나가는 우리에 대한 배려일까. 막상 코앞까지 오니 참지 못하고 쏟아 버렸을까. 발가락이 간지러울 법한 글귀다. 떠올린 그대로니 부끄럽지는 않다. 한데 아쉬움은 짙다. 수첩에 저 내용을 온전히 못 담아서. 볼펜이라 도리가 없다. 잠깐 멈춘다.
이내 떠올린다. 몇 넘겨지지 않은 장을 보며. 멋대로 그를 달래어 본다. 너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그렇다며. 곧이어 염원을 담는다. 그들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며. 그대로 적어버린다. 그에게 전하는 편지에 그들을 독려하는 글을 싣는다. 난 뭐 하는 놈일까. 다만 그 소원이 궁극적으로 그를 도우리라. 막연하게 믿을 뿐이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한다. 다다랐을 즈음 문득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그렇게 빗물에서 누워있는 도중, 욕구가 솟는다. 바로 적어야겠다고. 바빴던 하루여서 졸린 감이 있다. 다행히 욕구는 단단하다. 5시간 동안 이거 잡고 있으면 설명 끝났지.
전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가. 전하자. 특히 그 사람이 눈을 뜰 동안 말이다. 감았으면 이미 늦었지 않냐. 좋지 못한 지레짐작이다. 전달한 뒤 본인의 머릿속에서 지우겠는가. 함구한 뒤 체내에서 지우겠는가. 본인 입장이라면 상관있을 리 만무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하자.
본인의 힘이 닿지 못한. 피치 못할 피동이었다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