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떤 친구를 또 만나게 될지 몰라

by이곰
"고모, 하루 종일 집에서 뭐 해?"


조카들을 비롯해 전 온라인 게임 동료들에게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순간 물음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서 어느 날엔 나의 하루를 가만히 쭉 적어보았다.


아침 일찍 잠에서 깨면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하나 사 들고 집 앞에 놓인 종이신문 2종을 챙겨 온다.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으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리고 나서 오전에 매일 듣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간단히 단백질 음료를 먹은 다음 식물에 물을 주고 시든 잎을 잘라주고 나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오후에는 외출해서 볼 일을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노트북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가볍게 저녁을 먹은 뒤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나오는 최애 프로그램을 듣는다. 그 후 크로스핏을 하러 체육관을 가거나 우레탄이 깔린 놀이터에 가서 15분 동안 줄넘기를 하고 돌아오면 하루가 지난다. 이게 요즘 나의 대략적인 일상이다. 그런데 적다 보니 내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건 의외로 자격증 공부나 사업 구상 같은 거창한 일들이 아니었다.


최근 내 일상에서 새롭게 재조명하게 된 친구 둘은 바로 '종이신문 읽기'와 '라디오 듣기'다.


오전 2시간, 저녁 2시간 매일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오전에 듣는 프로그램은 사람들 사는 이야기와 음악이 주를 이룬다. 온라인 게임 다닐 때는 주말에만 간신히 들었는데, 퇴직 후 매일 듣고 있는데 요즘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는지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청취자가 보낸 사연에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울컥해 눈물을 찔끔 흘릴 때도 있다.


저녁에 듣는 프로그램은 클래식, 보사노바, 칸초네 등 다양한 세상 음악을 전해준다. 이 프로그램은 온라인 게임 다닐 때도 매일 들었다. 하루 종일 사람과 일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채 퇴근할 때 컴퓨터를 끄자마자 헤드셋을 끼고 라디오를 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눌 때도 헤드셋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가 순간 차단되는 느낌이 좋았다. 온라인 게임 다닐 때는 '위로'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일상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해주는 느낌이 강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저녁 친구 같은 느낌이다.


또 하나의 친구는 종이신문이다. 이제 텍스트를 읽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노안으로 시력도 안 좋아지고 조금만 읽으면 눈이 금세 피곤해지니 바카라 한 권 읽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스마트폰만 주구장창 보는 건 아닌 것 같고, 텍스트를 꾸준히 읽으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전반을 알아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종이신문이었다. 내가 돈을 주고 신문을 구독할 줄은 몰랐다. 신문 구독료가 생각보다 많이 올라 처음에 되게 놀랐지만, 예상치 못한 장점이 있었다. 세상 흐름도 파악하고, 텍스트 보는 연습도 하면서 일상을 채워주는 훌륭한 선택지가 되었다.


엄마 친구 한 분은 하루 종일 파크골프만 하시다 무릎 관절을 다치셨고 파크골프를 하지 못하게 되자 우울감이 크게 찾아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부모님 세대는 일상의 비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본인들이 이렇게 오래 건강하게 사실 줄도 모르셨겠지 싶었다. 일상을 채울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만난 파크골프였기에 본인이 모든 시간을 올인하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퇴직하면 매일 뭐 할 거야?"


회사에 나의 퇴직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남자 선배들이 특히 많이 물어보았다. 본인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난 후 스스로 해결해야 할 하루가 턱 하니 내 앞에 자리 잡았을 때, 무엇을 하고 누구랑 점심을 먹으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지 상상만 해도 공포스럽고 두렵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창대했던 미래의 계획은 퇴직 후 6개월 정도 푹 쉬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전공하고 싶었던 분야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순간, 선배들이 두려워하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하루'가 턱 하니 내 앞에 나타났다.


'너 뭐 할 거야? 대학원 계획만 세웠지 다른 건 없었잖아?'


손에 땀이 흥건히 나올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에게는 지금 쓰고 있는 '글쓰기'가 있었고, 퇴직 전부터 해오던 '봉사활동'이 있었다. 퇴직 후 우연히 만나게 된 '식물 키우기'와 '크로스핏' 친구, 결코 살면서 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러닝' 친구도 생겼다. 여기에 종이신문 친구까지 더해지니 예상하지 못했던 일상의 풍성함과 풍요로움이 생겼다.


퇴직 전 퇴직 후의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사가 그렇듯 삶은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계획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하다. 퇴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만든 계획이 어떻게 딱 들어맞을 수 있겠나. 계획처럼 딱딱 맞게 진행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닐까.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새로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친구를 만날 수 있다니!'
'전부터 알던 친구인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


아예 새롭게 만나는 친구도 생기고, 대충 알고 지내다 퇴직 후 절친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겁먹을 필요 없다. 한정된 경험을 기반으로 세운 퇴직 후의 계획이 아닌,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만남들이 나를 생각지도 못한 길로 안내해 줄도 있으니까.


그리고 각각은 소소한 루틴이지만 이 루틴들이 하나로 모이면 의외의 시너지를 내면서 내 일상을 든든하게 받쳐주기도 하니깐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안심해도 된다.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보다 내 일상은 굳건하게 잘 굴러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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