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의 쓸모

by이곰

인생 최고의 더위를 확인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올해 여름엔 그 더위 만큼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과의 문제가 함께 찾아왔다. 가뜩이나 여름을 타고 정신 차리기 어려워하는데 관계의 어려움까지 더해지자 일상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여름 날씨 하나만으로도 생산적인 행위를 하기 힘들었을 텐데, 인간관계의 문제는 나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고 점심을 먹고 나서는 오후 내내 그냥 침대에 누워 있었다. 좌우로 몸을 뒤적거리며 오후를 보냈다.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침대에 오래 누워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싶어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댄다. '하이큐'라는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어 눌러보았다. 무슨 만화인지도 모르고 심드렁한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 배구 만화였다. 화면 안 주인공들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데 나는 침대가 아닌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다. TV 모니터에서는 배구라는 세상 안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화면 밖 나는 눈동자 외에는 어느 것 하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늪 속에 빠져 있는 기분이다.


상반기에는 나름 꾸준히 온라인카지노북에 글을 올려왔다. 그런데 몇 달간 글을 올리지 않으니 온라인카지노북에서 알람이 왔다. 글쓰기도 운동과 같아서 꾸준히 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충 읽고 알람을 지웠다. 나 역시 아는 사실이지만 몸도, 마음도, 머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그러다 <스님과 손님>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출연진의 질문에 법륜스님이 답을 해 주셨다. 요지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매와 같고,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리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 이 둘을 다 받지 않는다."


한참 동안 멍해졌다. 당시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보고 계신 듯했다.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느꼈던 즐거움의 크기만큼, 괴로움도 딱 그만큼의 크기로 다가왔다.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챙겨주며 느꼈던 즐거움만큼, 나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상대에게 그것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자 괴로움이 턱 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충분히 즐거웠으니 이제 그만큼의 괴로움을 감당하라는 듯이.


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깨달음은 있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체득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할 것 같다. 지금도 앙금이 깔끔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머리로 깨달은 것이 마음으로 스며들기까지는 시차가 존재한다. 다행히 농도는 처음에 비해 꽤 옅어졌다. 하지만 즐거움과 괴로움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균형을 맞춰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초여름에 시작된 홍역이 한여름을 거쳐 늦여름까지 이어지고 있다. 초여름에는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모습은 한여름까지 이어졌다. '이러려고 퇴직한 건 아닌데'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도 편안하게 봐주기로 했다. 살면서 언제 이렇게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석 달에 걸친 '침대와의 한 몸' 시간이 요즘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일부러 점심 약속을 잡아 외출도 하고, 해가 지면 줄넘기를 들고 근처 놀이터로 간다. 마실 나온 어르신들이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시는 게 다소 민망하지만, 여름 내내 찐 살들을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불어난 몸무게는 여름 내내 흘려버린 무용한 시간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쓸모없이 보낸 시간이라 자바카라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용한 시간 덕분에 내 앞에 떨어진 고민거리를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의 고민거리들이 내 앞에 등장할 것이다. 그때마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해결하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대신, 이번 경험처럼 무용하게 느껴지는 시간들에 나를 그냥 맡겨보는 것. 이것 역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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