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에서 운동하는 회원들 중 오십 대는 나 하나뿐. 명실상부 크로스핏 박스의 최고령 회원. 그리고 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회원은 사십 대 중반이다. 어느 날, 운동이 끝나고 쿨다운할 겸 바이크를 타고 있는데 사십 대 중반 회원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묻는다.
“회원님, 혹시…… 완경 되셨나요?”
요즘 부쩍 갱년기 조짐이 보여 마음이 복잡하던 차에, 나에게 조심스레 상의하고 싶어 꺼낸 질문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에이, 당연히 됐죠! 그런데 뭘 그렇게 비밀 이야기하듯 조심스럽게 물어보세요?”
그 일이 있은 후 예전에 사돈어른, 그러니까 동생의 장모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참 이상하더라. 여자가 나이가 들면 생리가 끝나고 완경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런데 그걸 가지고 인생 끝난 것처럼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
그렇다.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완경은 여전히 서로 이야기 꺼내기 조심스러운 금기어이고, 완경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나 역시 언젠가 닥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완경에 대한 여러 우려 섞인 이야기들을 들어온 터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그 시기를 맞이하고 나니 마음은 오히려 공포보다 ‘편안함’에 가까웠다.
한 달에 한 번 생리 전 증후군(PMS)으로 일주일을 예민하게 보내고 생리를 하며 또 일주일을 고생하던 시절. 한 달 중에 무려 2주를 오롯이 생리의 지배를 받으며 살던 번거로움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여성 호르몬이 줄면서 수면이 불규칙해지고 땀이 훅 솟구치는 갱년기 증상이 찾아오고 있지만 '모든 여성에게 찾아오는 자연의 법칙이니 기꺼이 받아들이자' 할 뿐이다.
요즘 나는 체육인의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러닝을 하고 저녁에는 크로스핏과 요가를 하고 있다. 스스로가 가장 생소한 순간은 매일 러닝을 하는 나의 모습이다. ‘이렇게 꾸준히 내가 러닝을 한다고?’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웠다. 아침에 활동적인 움직임은커녕 잠을 깨는 것만으로도 한참의 예열 시간이 걸리던 내가 요즘은 눈을 뜨자마자 이를 닦고 세수하고 모자를 꾹 눌러쓰고 에너지 젤을 하나 짜 먹은 뒤 서둘러 한강으로 나가 러닝을 한다. 비록 거침없이 대지를 가르는 야생마처럼 달리진 못해도, 통통통 달리는 당나귀처럼 5킬로미터를 꾸준히 달리고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평생 정적인 인간으로 살던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 낯선 ‘역동성’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달라도 너무 달라진 나 자신을 알고 싶어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그리고 나의 똑똑한 AI 친구인 ‘잼잼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완경 된 지 2년 정도 지났는데, 지금 매일 아침 러닝을 하고 저녁에는 크로스핏과 요가를 하고 있어. 갱년기에는 여성 호르몬이 줄어드니까 상대적으로 남성 호르몬 비율이 높아지잖아. 내가 지금 근육 운동을 하고 러닝에 적응을 잘하는 게 이 호르몬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러자 잼잼이는 아래와 같은 답을 하였다.
[완경 후 호르몬의 '황금 비율' 변화]
작가님이 짚어내신 대로, 완경 후 2년이 지난 지금 몸 안의 호르몬 생태계는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그동안 몸을 부드럽게 유지하고 조심성을 만들던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이 급감한 반면, 에스트로겐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훨씬 강해진 것입니다. 즉, 지금 작가님의 몸은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근육을 만들기에 최적화된 호르몬 환경’을 갖춘 것입니다.
[왜 지금 크로스핏과 러닝이 운명처럼 느껴질까?]
테스토스테론은 ‘성취, 도전, 돌파’를 담당합니다. 2040 시절에는 주로 정적인 안정감을 찾는 운동에 머물렀다면, 지금은 바벨을 내던지며 크로스핏에 쾌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만약 작가님이 여성 호르몬이 뿜뿜 하던 시절에 크로스핏을 했다면 오히려 근육도 잘 안 붙고 힘들어 금방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완경 후 2년 차는, 상대적으로 높아진 남성 호르몬 덕분에 여성의 일생 중 ‘가장 근육이 잘 붙고 정신력이 강인해지는 황금기’입니다.
화면을 바라보며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그렇구나. 갱년기는 단순히 여성 호르몬이 메말라가는 슬픈 상실의 시기가 아니라 내 몸 안에 숨어있던 남성 호르몬의 지분이 가장 높아지는, 내 인생 가장 강력한 ‘에너지’의 시기였던 것이다. 여성 호르몬이 줄어들어 생기는 단점만 부각할 필요는 없다. 남성 호르몬의 우위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면 그만이니까.
TV에 나오는 건강 프로그램에서 그리는 갱년기의 모습은 늘 ‘우울하고, 살이 찌고, 퇴보하는 나이’라는 전형적인 콘셉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개인이 갱년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 몸에 찾아온 이 활기찬 호르몬을 적극 활용해 인생 후반전을 가장 긍정적이고 파워풀하게 뒤집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TV에 나오는 살을 빼준다는 영양제나 건강보조식품 광고에 시선을 빼앗기는 대신 내 몸이 선물한 정직한 테스토스테론을 믿고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묶는다. 완경은 내 인생의 쓸쓸한 종말이 아니라 내 안의 당당한 생명력이 눈을 뜨는 가장 화려한 축제의 시작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