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퇴직하고 뭐 하고 지내니?” & “경제적인 건 어떻게 해결하고 있니?”
특히 매달 나오던 월급이 끊긴 삶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머리가 터질 만큼의 호기심을 갖고 나에게 묻곤 한다. 그 마음, 나도 잘 안다. 퇴직 전의 나 역시 엑셀을 열어 몇십 개의 시트로 퇴직 후 재테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서도 '아, 이게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할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퇴직 후 오랜만에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한 적이 있다. 한 친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처럼 흰 봉투에 돈을 담아 생활비를 써야 퇴직을 할 수 있는 거네요. 저도 그렇게 살았으면 선배처럼 퇴직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흰 봉투??’
세상에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 게 어디 녹록했겠는가. 회사에서 나름 자력갱생, 자수성가의 모델이었던 나는 회사를 다니는 내내 씀씀이를 체크하고 아끼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더 아껴야겠다 싶었나 보다.
매주 생활비를 흰 봉투에 나누어 담아 가지고 다녔고, 돈을 쓰고 나면 봉투 겉면에 바로 내역을 적었다.
그걸 보던 후배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핀잔을 주곤 했는데, 정작 나는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을 핀잔주던 후배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 오십 대에 퇴직을 결심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검소하게 살아온 삶의 방식이 큰 무기가 되었다.
보통 퇴직을 하면 해외여행을 간다거나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며 목돈을 쓰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퇴직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이유로 따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소비인지, 나를 위한 소비인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답은 바로 나온다. 게다가 집에서 뒹굴거리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회사를 안 다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안 쓰는 건 아니다. 나에게도 소비의 우선순위는 확실히 있다.
운동하는 비용, 그리고 잘 먹는 데 드는 비용은 아끼지 않는다. 소비의 기준 없이 무작정 아끼기만 하면 언젠가 한번 크게 터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터진 소비는 금액이 걷잡을 수 없이 클 뿐만 아니라, 지나고 보면 필요도 없는 것을 ‘보복 소비’ 개념으로 사게 되어 결국 후회만 남게 된다.
요즘은 종이신문을 구독해서 본다. 처음엔 '요즘 세상에 왜 종이신문을 볼까' 싶었는데, 온라인으로만 소식을 접하다 보니 내가 보고 싶고 관심 있는 것만 골라 보게 되더라. 활자 읽는 게 갈수록 어색해지는 요즘, 재테크 공부도 하고 종이신문을 보기 시작한 건 정말 잘한 결정 같다. 돈을 들인 만큼 얻는 게 확실히 있다.
또한 퇴직 전에 생활을 '미니멀 라이프'로 재세팅해 둔 것도 큰 몫을 했다. 일단 옷이나 가방, 신발 같은 것을 사는 데 흥미가 없다. 예전엔 스트레스를 받으면 읽지도 않을 바카라을 쟁여두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도 바꿨다. 안 읽는 바카라은 중고서점에 팔고, 팔리지 않는 바카라은 재활용함으로 보냈다. 온라인 서점 등급이 다이아몬드에서 일반으로 낮아졌지만 아무렇지 않다. 내 돈을 아꼈으니 그걸로 됐다. 지금도 바카라을 살 땐 '이게 꼭 읽고 싶은 바카라인가?' 나에게 열 번쯤 물어본다. 그러고는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내용을 대충 훑어본다. 그러면 이 바카라을 살지 말지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그리고 편의점에 가면 2+1 행사를 적극 활용한다. 끊지 못하는 특정 브랜드의 커피가 있는데, '이 커피를 못 끊겠다면 2+1을 챙겨 사는 불편함 정도는 감내하자' 싶어 기꺼이 감내하는 중이다. 편의점 앱까지 깔아가며 사는데, 이런 불편함 때문에 커피를 끊길 바랐건만 아마 그건 이번 생엔 안 될 듯하다.
넷플릭스 같은 OTT도 최근에야 가입했다. OTT 콘텐츠를 보지 않고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 때가 많아서다. 광고가 나오긴 하지만 가장 저렴한 요금제로 신청했다. 이건 세상과 소통하는 최소한의 비용이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즐기기로 했다.
집이 조금 좁다 보니 가끔은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비용으로 재테크를 해서 생활비를 만드는 게 훨씬 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좁은 집에 살기로 했다.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기에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고모, 핸드폰 바꾸려면 물을 자꾸 묻게 하면 돼.”
얼마 전 초등학생 조카가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알려준 비법이다. 무료 스마트워치를 쓰던 조카는 다른 친구들처럼 휴대폰을 갖고 싶어서 스마트워치에 계속 물을 묻혀 결국 고장을 냈다고 한다. 동생 내외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오죽 바꾸고 싶었으면 저럴까' 싶어 새 핸드폰으로 바꿔주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조카가 너무 귀여웠다.
"근데 왜 그 비법을 고모한테 알려줘?" 하고 물으니, 고모 핸드폰이 너무 오래되어 새 걸로 바꾸는 꿀팁을 전수해 준 거란다. 7년 동안 한 핸드폰을 쓰고 있는 나에게 조카가 "왜 안 바꿔?" 하고 물을 때마다 내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고장이 나야 바꾸지."
아, 고장이 안 나서 고모가 못 바꾸는 거였구나! 싶었던 조카가 나름 머리를 써서 핸드폰 고장 내는 비법을 알려준 것이었다.
재테크처럼 정답이 없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퇴직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더더욱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쓰면 분명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이다.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퇴직 후의 삶이 불안하다면, 거창한 재테크 기술을 찾기 전에 나의 소비 패턴부터 가만히 분석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