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매와 점프슈트의 자유로움

by이곰

매해 4월쯤 되면 옷장이 난리법석이 난다. 가끔 꽃샘추위를 빙자한 겨울바람이 불어와 겨울 코트를 세탁소에 맡기지 못한 채 옷장에 방치하고 있다. 초봄과 완연한 봄 사이 날씨라 봄 옷을, 그러다 가끔 한여름 더위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날씨에 놀라 반팔 몇 개를 꺼내 놓는다. 봄, 여름, 겨울 옷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옷걸이를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옷장 정리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리를 위해 처음 해야 할 일은 정리해야 할 모든 것들을 한눈에 담는 일이다. 옷장의 모든 문을 열어 본다. 옷장 일부분만 볼 땐 몰랐는데 안 입는 옷이 눈에 띈다. 바로 온라인 게임을 다닐 때 입었던 정장이다.


온라인 게임 다닐 때도 옷을 많이 사서 입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정장이 쌓여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원피스였다. 원피스 하나하나를 꺼내 보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조선백자처럼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밑부분이 나온 55 사이즈 원피스. 맞다. 5년 전후로도 나는 55 사이즈 원피스를 입고 출근을 했다.


퇴직을 한 지금, 잊고 있던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두 다리를 집어넣고 올려 보았다. 그럼 그렇지. 예상대로 허벅지에서 원피스가 걸려 올라가지 않는다. 내 몸은 이제 온라인 게임을 다닐 때 그 몸이 아니다.


옷장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원피스와 정장을 과감히 꺼내 재활용함에 넣었다. 정장과 원피스를 하나씩 함에 넣는데 마치 예전의 나를 보내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보내줘야 하는 것들이었다.

비워진 옷장의 빈자리는 운동복과 운동 도구로 채워나갔다. 레깅스와 운동복 상의, 헤어밴드와 모자, 요가 매트와 폼롤러, 케틀벨과 덤벨이 자리를 채웠다. 내 옷장은 이제 체육인의 옷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전까지 운동할 때 늘 반팔 티셔츠를 입었는데, 어느 날 민소매를 입고 운동하는 친구를 보게 되었다. '너무 시원하겠는데?'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젊을 때조차 민소매를 입어본 적이 없다. 팔뚝이 드러날만한 야외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사무실에서 민소매를 입고 일할 수도 없었다. 여름이면 사무실 안은 에어컨 때문에 늘 추워서 긴 팔에 카디건, 무릎담요까지 걸치며 일을 한 터라 민소매는 입을 일이 없었다.


크로스핏은 땀을 워낙 많이 흘리는 운동이어서 어느 순간 반팔 티셔츠마저 걸리적거렸다. 그래서 민망하지만 민소매 티셔츠를 하나 사서 집에서 입어보았다. 거울을 보았는데 팔 전체가 드러나는 게 너무 어색했다. 보통은 운동복을 입고 체육관에 가는데, 민소매 차림으로는 차마 밖에 나갈 수가 없어서 가방에 따로 챙겨갔다.


그리고 처음 민소매를 입고 운동을 했는데…… 이건 너무 시원한 거다. 반팔 티셔츠에서 대충 가로세로 10센티 정도의 천조각만 없어진 건데 운동할 때 시원하고 편안했다. 해방감마저 느꼈다. 그 후로 반팔 티셔츠 역시 정리되었고, 평상복까지 민소매 옷으로 대체되었다.


다음은 점프슈트. 우리가 흔히 멜빵바지로 칭하는 바로 그 바지다. 대학교 때 입었던 기억이 잠시 있었는데, 그 후로는 멜빵바지를 입으며 발랄하게 일상을 보낼 만큼 편안하고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민소매를 입다 보니 민소매가 가장 잘 어울리는 하의가 점프슈트 같았다. 쇼핑을 하는 걸 피곤해하는 내가 여러 곳을 검색하고 나에게 맞는 점프슈트를 사기에 이르렀다.


민소매에 점프슈트를 덧입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입고 부모님을 뵈러 갔다. 크로스핏으로 체격이 커지고 민소매에 점프슈트까지 입은 모습을 보시더니 아빠가 말씀하신다.


"너 뒷모습만 보면 아무도 못 건들게 생겼다. 어깨 갑바가 장난이 아니다."


가족 중에 아빠와 동생은 내가 민소매를 입는 걸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동생은 조용히 말했다.


"누나, 나이에 맞게 옷을 입어."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 나이에도 점프슈트 말고 다른 옷은 불편해서 못 입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쿨하게 편을 들어주신다.


"네 맘대로 입어라."


내 모습이 마치 미국 영화 포스터 속, 멜빵바지를 입고 마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늠름한 남자 주인공 같기도 하다. 옷이 바뀐 것뿐인데 나는 해방감마저 느꼈다. 자유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옷이 바뀌니 여름이라는 계절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민소매에 점프슈트는 여름에만 허락되는 스타일이다.


몸이 말랐을 때는 여름만 되면 기력이 떨어져서 돌아다니질 못했다. 온라인 게임에서 에어컨 바람에 덜덜 떨며 하루 종일 보내다가 퇴근할 때 잠깐 땀 흘리고 집에 와서 다시 에어컨을 켜는 일상이었다. 여름에 기분 좋게 땀을 흘리며 뭔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여름에 운동을 하고 온몸으로 땀을 흘려보니 내가 딴 사람이 되어 있다.


‘아, 여름에 땀이 나는 운동을 해도 쓰러지지 않는구나.’


더우면 더울수록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워놔야 뜨거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2026년 여름도 이미 시작되었다. 아침 러닝할 때도 민소매를 입고 운동하고, 일상복도 민소매와 점프슈트 차림이다. 이번 여름, 내가 얼마나 야생마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닐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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