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양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결에 몸을 왼쪽으로 돌려 '산이'를 품에 안았다. 잠이 들 듯 말 듯 얕은 호흡을 이어가다 다시 눈이 번쩍 뜨였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몸을 굴려 '탄이'를 안았다. 산이와 탄이. 오십 대 퇴직자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사는 반려인형들의 이름이다.
퇴직 이후, 나는 마치 깊은 겨울잠을 자는 곰이 된 것 같았다. 한꺼번에 밀린 잠을 청산하려는 것처럼 틈만 나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눈을 뜨는 시간이 늘 한결같다는 점이다. 20년간 몸에 새겨진 출근길의 DNA가 작동하는지 시계는 정확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깨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난다. 대충 사과 하나, 요거트 하나를 챙겨 먹고 또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선잠을 청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묵직한 신호를 보낸다.
‘이제 좀 움직여.’
집 앞 편의점으로 커피를 사러 나가는 일은 퇴직 이후 나를 깨우는 작은 의식이자 루틴이 되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을 손으로 대충 쓸어내리고 눈곱만 뗀 채, 바지와 웃옷을 주워 입는다. 그리고 야구모자를 머리에 푹 눌러쓴다. 이 차림은 퇴직 후 나의 공식 외출복이자 유니폼이 되었다.
문을 열고 나선 아침 8시, 도시 이곳저곳은 저마다의 속도로 깨어나고 있었다. 가방을 메고 조잘거리며 등교하는 초등학생들, 지각할까 봐 발걸음을 재촉하며 뛰어가는 온라인 게임인들, 반려견의 목줄을 끌며 여유롭게 산바카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빗자루로 가게 앞을 쓸며 하루를 준비하는 사장님까지.
늘 가던 편의점에 들어가 늘 마시는 커피가 있는 매대로 향했다. 온라인 게임인 시절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2+1'이라는 빨간 글자가 요즘은 유독 선명하고 또렷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커피를 들고 돌아오는 길의 풍경은 출근길의 그것과 묘하게 달라져 있다. 잠옷에 가까운 편안한 옷차림으로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 사람들은 오늘 휴가일까? 아니면 나처럼 퇴직한 사람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사연을 상상해 보게 된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묘하게 낯설면서도 싱그럽게 나를 감싼다.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와 문이 툭, 닫히는 순간 비로소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실감이 밀려왔다.
'아…… 이제 정말 출근을 안 해도 되는구나.'
유달리 새파란 하늘을 자주 볼 수 있는 요즘, 나는 내 일상에 새로운 루틴을 추가했다. 에너지 젤을 하나 챙겨 먹고, 러닝복에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한강으로 나간다.
주중이든 주말이든, 아침의 한강은 한가롭다. 가끔은 이 광활한 공간을 내가 통째로 전세 냈나 싶을 정도로 고요할 때가 있다. 일직선으로 뻗은 길,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 그리고 강물 위로 보석처럼 부서지는 수많은 윤슬을 바라본다.
종종 앞뒤에 사람이 없는지 한번 확인하고 영화 속 주인공처럼 양손을 좌우로 활짝 펼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가장 눈부신 클라이맥스를 향해 내닫는 기분이다.
많은 이들이 퇴직 이후 스스로 채워야 하는 일상의 공백을 두려워한다. 예전에는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이 짜놓은 판 안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하지만 퇴직을 하는 순간, 오롯이 나 스스로 설계하고 채워나가야 하는 시간들이 내 눈앞에 통째로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이런 변화 앞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 텅 빈 시간 역시 내 인생이란 퍼즐판의 소중한 한 조각이다. 결국 내가 스스로 맞춰나가야 할 내 삶이다.
퇴직 이후의 일상은 별다른 자극 없이 매일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 비슷비슷한 하루들이 모여 내 인생의 진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런 자극도, 약속도 없는 무맛(無味)의 하루. 하지만 이 슴슴한 평온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바랐던 나의 진짜 속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