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보다 어머니였다

모든 전쟁은 한 어머니를 울린다

by운조



전쟁은 나라를 무너뜨리기 전에 한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무너뜨린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헤카베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트로이의 왕비로 기억한다.

그러나 내게 그녀는 왕비보다 먼저 어머니였다.

헤카베는 수많은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그 가운데 가장 믿음직한 아들이 헥토르였다.

트로이의 마지막 희망.

백성들이 가장 사랑했던 영웅.

그러나 어머니의 눈에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들이었다.

『일리아스』 제22권.

아킬레우스와 마지막 결투를 앞둔 헥토르를 향해 헤카베는 성벽 위에서 애타게 외친다.

돌아오라고.

혼자 싸우지 말라고.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며 애원한다.

"이 젖을 생각해 다오."

어린 헥토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며 키웠던 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호소였다.

그녀는 왕국보다 아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끝내 성문을 나선다.

그 순간 그는 트로이의 영웅이었지만, 헤카베에게는 아직도 품 안에서 자라던 아들이었다.

결국 헥토르는 돌아오지 못한다.

아킬레우스는 그의 시신을 전차 뒤에 묶어 끌고 다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헤카베의 절규는 『일리아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 장면을 읽으며 문득 우리의 역사가 떠올랐다.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6·25전쟁의 산과 들에도 이름을 부르며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들이 있었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선가는 또 다른 헤카베가 돌아오지 않는 발걸음을 기다린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어머니의 기다림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전쟁은 국경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지만, 어머니의 눈물만은 어느 시대나 같은 모양으로 흐른다.

헤카베는 왕비였지만, 마지막까지 왕관보다 아들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영웅의 승리를 오래 기억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며 밤을 지새운 어머니들의 눈물은 쉽게 잊는다.

『일리아스』는 영웅들의 서사시로 불린다.

하지만 내게 이 작품은 어머니들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헤카베를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전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남는 것은 폐허뿐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끝내 기다림을 놓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일리아스』를 덮은 뒤에도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영웅들의 함성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끝내 아들의 이름을 부르던 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