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버리자 보이기 시작한 것들

by강아


읽고 있던 바카라은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였다.

계급과 성정체성에 관한 바카라이다. 여성에게 허락된 슬롯적 기회가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던 시절, 작가의 어머니는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다. 낙태권에 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지적 여정과 경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이야기한다. 교사로 시작해 글을 기고하고, 하나의 경력이 다음 기회로 이어지면서 강단에 서게 된다. 그 과정을 읽으며 지금 내가 하는 일들도 언젠가는 서로 연결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재로서는 무엇 하나 확정된 것이 없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무관해 보였던 활동들이 하나의 경로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낸 과정도 눈여겨보았다. 동성애가 지금보다 훨씬 강한 배척의 대상이었던 슬롯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과 정체성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글은 여러 나라에서 읽혔다. 슬롯적 체면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숨겼다면 같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가 쓴 글에서 개인적인 경험은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슬롯를 분석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다가 잡플래닛에서 회사 리뷰를 열람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기에 들어가 보았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를 검색했다. 읽다 보니 내가 왜 그런 회사를 그렇게 오래 다녔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회사에 있을 때도 블라인드나 기업 리뷰를 관리자들이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회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져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읽은 후기들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박상후. 상위기관의 하청처럼 일하면서 위에는 예스맨이 되고, 실무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꼬리를 자르는 관리자. 직급에 따라 업무의 경중이 제대로 나뉘지 않고, 다른 공공기관과 비교하면 연봉도 하위권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사수라는 개념이 희미해 A부터 Z까지 혼자 부딪쳐가며 배워야 하고, 그러다 다른 기관으로 옮기면 오히려 에이스 소리를 듣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애초에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라 거쳐 가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임원의 업무추진비를 본부마다 나눠 부담한다거나 직원들의 근태를 엑셀로 관리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익명의 후기이니 모든 내용을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곳에서 십 년을 보낸 나에게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퇴보할 것 같다는 것. 내 커리어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그런데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지나간 시간이 아까웠다. 잃어버린 십 년 같았다. 물론 그동안 월급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집도 마련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소모한 시간과 감정까지 월급으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위계였다.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말이 더 중요해지고,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의 판단보다 상사의 체면이 우선되는 일들. 위에는 순종하면서 아래에는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런데 이제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그런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명함에 적힌 직급으로 나를 설명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회사 밖에서도 관계는 존재했다. 취미로 하던 방송에서 어느 순간부터 애청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게 무슨 소용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서로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까지 했다. 만날지 안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그가 내 신상에 보이는 관심이 부담스러워졌다. 언젠가 내가 지나가듯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경제적 자유를 얻은 것이냐고 물었다. 왜 타인의 경제적인 것을 묻지? 질문 자체가 악의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불편했다. 그때부터 방송을 하면서 별생각 없이 흘렸던 개인적인 정보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게 되었다.


방송자와 시청자의 관계는 미묘하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내고, 어떤 사람은 돈을 내지 않는다. 그 차이는 화면 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후원한 금액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고,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의 글자는 회색으로 표시된다. 어떤 방송자는 그런 사람의 채팅은 읽지도 않고 이른바 '열혈'들의 경쟁에만 신경을 쓴다. 나는 그런 방식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특별히 대우하고, 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후원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을 비슷하게 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태도는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을 이유를 없애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방송 자체를 좋아해서 후원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후원을 통해 얻는 관심과 지위도 소비의 일부일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내면 더 많이 인정받고, 다른 시청자보다 방송자와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구조다. 생각해 보면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직급이 사람의 위치를 결정했고, 방송에서는 돈이 그 역할을 했다. 물론 둘은 서로 다른 관계다. 회사의 직급에는 공식적인 권한이 있고, 방송의 후원은 자발적인 행위다. 하지만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지 구분하고, 그 차이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오늘 읽은 바카라에서부터 예전 회사, 그리고 방송까지 온종일 계급에 관한 것들을 들여다본 셈이었다.


태어난 집에 따라 나뉘는 계급이 있고, 직급에 따라 만들어지는 계급이 있고, 돈을 얼마나 내느냐에 따라 생기는 서열도 있다. 형태는 달라도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위와 아래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역학관계에 지쳤다.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사람을 누르는 것이 싫었고, 방송에서는 돈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싫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군가의 호의나 관심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음악이다. 방송을 켜지 않으면 피아노를 칠 이유를 잘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음악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순간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혼자 연습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연주한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험은 다르다. 누군가가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주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은 별개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사생활을 알고 싶지는 않고, 내 사생활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후원에 감사할 수는 있지만 그 대가로 특별한 친밀감을 제공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태도가 방송자로서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방송은 결국 사람을 모으는 일이고, 사람을 모으려면 어느 정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연주를 하려고 방송을 시작했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 차이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피곤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사람을 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상대의 의도를 추측하고,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관계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일. 그것들은 회사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어쩌면 내가 지친 것은 피아노도 방송도 아닌지 모른다. 그 안에서 또 하나의 계급을 견뎌야 하는 일이 지겨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다닐 때는 소속이 나를 설명해 주었다.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면 사람들은 대강 나를 이해했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나니 이제는 나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점점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진다. 직업도, 수입도, 앞으로의 계획도. 누군가에게 그것들을 이야기하고 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기준에 따라 나를 판단할 것이다.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을 그만둔 사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 혹은 아무런 대바카라 없이 퇴사한 사람. 어느 쪽이든 내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바카라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명함을 버리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명함이 사라지고 나니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준을 만들어내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직급이었고, 방송에서는 후원 금액이었다. 일상에서는 직업과 재산과 학력이 그 역할을 한다. 그런 기준들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에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사람을 판단하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 기준에 맞춰 내 위치를 증명하는 일에 시간을 덜 쓰고 싶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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